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28)

28.

by 작가 전우형

28.


가만히 있는 게 두렵다면 그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거라고 했다. 하루를 붙잡지 않으려면 날카로운 통증에 익숙해져야 했다. 해가 질 때, 구름 뒤를 볼 때, 눈가를 만지지 않아도 됐다. 우울한 건 아니었다.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문이 열릴 때 시간은 눈보라처럼 갑자기, 하얗게 몰아쳐 왔다. 자잘하게 일어난 입술 껍질을 뜯는 것처럼, 기다릴 때는 모른다. 실은 혼자 앉아있는 시간이 늘 불편했다는 걸. 마른 손의 온도를 끊임없이 체크하고 있었다는 걸. 핫팩을 쥐면 손이 뜨겁고 놓으면 차가웠다는 걸. 웅크린 어깨를 펼치면 고장 난 시소처럼 삐걱거렸다는 걸.


발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 봄이 보였다. 그곳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스타워즈 전반부 에피소드가 후반부보다 늦게 만들어진 이유 같다고나 할까. 그 당시 내 마음속 컴퓨터 그래픽은 그녀의 진짜 모습을 담아낼 만큼 섬세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며 과거를 아쉬워하는 건 정말이지 난센스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넘어갈 수 있는 다리 같은 건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엔 통유리창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있지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같은 곳에 있어도 함께는 아니었다.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도 호흡이 만나지 않을 거리. 어디선가 나의 이름이 들려도 결코 돌아보거나 멈칫하지 않을 거리. 물리적 거리로 규정지을 수 없는 관계.


그녀는 나를 보면 깜짝 놀라곤 했다. 그건 내가 올 거란 걸, 말을 걸 거란 걸 몰랐다는 뜻이다. 나는 물걸레로 유리창을 닦았다. 안쪽을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나는 바스켓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산재한 거미줄부터 쓸어내야 했다. 바닥을 쓸던 긴 대빗자루로 모서리 부근을 휘휘 저으며 그것들을 털어냈다. 붙어있던 먼지와 가루가 날리며 머리와 어깨 위황사바람처럼 쏟아졌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잔기침을 했다. 그래도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보다는 이게 차라리 나을 거라고 위안 삼으며. 눈에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취급받는 것들이 있었다. 실은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위험하단 걸 아예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도 많은데.


나는 수도꼭지에서 호스를 풀어왔다. 어닝 바로 아래에서부터 물이 흐르도록 물줄기를 쏘아 보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움츠러들 틈이 없었다. 자칫하면 수도꼭지도 곧 얼고 말 것 같았다. 바스켓에 담아둔 물걸레에서 바직 하고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바스켓에 뜨거운 물을 받아 걸레를 녹였다. 그리고 접이식 사다리를 펼쳤다. 걸레질과 추위는 생각을 지우는데도 제격이었다. 구석진 곳은 손이 잘 닿지 않았다. 발끝을 세우고 바들바들 떨다가 이내 진이 빠져 주저앉았다. 먼지가 조개껍질처럼 굳은 자리가 있었다. 걸레를 손가락에 감고 문질렀다. 덩어리가 툭 떨어져 나가면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모두 하는 건 무리였다. 정면 유리 한쪽과 오른쪽 측면 유리만 마치고 들어와서 앉았다.


손이 홍로처럼 익어있었다. 양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고 한참을 문질러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유리창을 닦은 쪽으로 옮겨 앉아서 밖을 봤다. 자동차며 건물, 울타리, 나무 탁자, 가로등, 전신주, 건너편의 세차장과 빌라까지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보였다. 그리고 바람과 시간에 긁힌 마모 자국들까지.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난 여전히 손이 시렸고, 창자 아래가 싸늘했다. 유리창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없던 것들이 새로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자 기분만 더 가라앉았다.


나는 손등을 보았다. 그새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 깊어져 있었다. 어떤 것들은 이름처럼 보였다. 눈이 부셨다. 주차해둔 차의 크롬 라인에 반사된 빛이 정면으로 눈을 찔러왔다. 그래도 오늘은 해가 있어 따뜻한 편이었다. 낙엽이 모두 떨어졌어도 오후는 사람 사는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걷는 내내 나는 부서진 은행낙엽과 얼어붙은 주황빛을 띠는 짓이겨진 흔적들만 눈에 들어왔다.


**


몇 걸음만 옮기다 보면 미친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려야 했다. 콘크리트 벽면 사이로 녹슨 철근이 삐져나와 있었다. 벌써 몇 군데 살갗이 아렸지만 신경이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공간의 음침함과 냉기가 훨씬 더 치밀했던 탓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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