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29)

29.

by 작가 전우형

29.


그 공간은 죽은 것 같았다. 무생물도 나이가 든다는 걸, 나는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을 보며 생각했다. 빛은 흔들리고 깜박인다. 힘을 잃고 사그라드는 빛 아래로 공간은 밝은 그림자처럼 서서히 잠든다. 그 모습은 십오 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오래되고 익숙한 얼굴을 바라본다. 누군지 알아보겠으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느낌. 덩어리처럼 만져지는 시간의 촉감. 손 끝에 닿는 주름의 감촉. 내리까는 시선들 사이로 말없이 오가는 사죄의 기억들. 침묵의 대화 끝에 아버지와 내가 머물던 공간은 갑자기 나이가 들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어딘가에 우리의 일부를 두고 왔다. 그리고 그곳의 일부를 가져왔다. 사진 속에서 그녀는 달리는 기차 안에 있었다. 정지한 선로 위로 기차는 빨라진다. 사진에 비친 모습은 밖이 달리고 있다. 그녀는 그저 바라본다. 그리고 나도 그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 속의 역사에 나는 서있었다. 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기차를 바라본다. 기차가 만들어내는 바람이 굉음을 일으키며 H 모양으로 다듬어진 철로를 달린다. 철로에는 틈이 있다. 추워지면 열리고 더워지면 닫히는 가느다란 틈이. 나는 한치의 틈도 없는 철로를 역사 가장자리에서 내려다본다.


나는 추웠다. 그 역사에 섰을 때처럼 추웠다. 추위의 위력을 경험한 건 그때가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연병장에서 졸업식 연습을 할 때였다. 바로 뒤 바다에서 축축한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한 시간쯤 바람을 맞으며 서있은 뒤 나는 다음 연습 때부터 더 이상 껴입을 수 없을 만큼 예복 안에 옷을 더 입었다. 내복을 입고 아랫배와 발목, 허리춤에 핫팩을 붙이고 체육복을 한 겹 더 챙겨 입었다. 두 번째는 작은 잠수정을 타고 겨울 훈련을 나갔을 때였다. 반나절 항해 후 나는 허리 아래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꼈다. 나는 다음 항해를 준비하면서 두터운 항해복 안에 내피를 추가했고, 모양 말을 세 개 겹쳐 신었으며 함상화와 스키 장갑 안에 핫팩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그 역사에서였다.


그날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희영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했다. 반팔 셔츠 위에 얇은 정장 하나를 걸친 채 이온음료가 든 페트병을 손에 쥐고 연신 트림을 하며 서있었다. 트림을 할 때마다 어딘가에서 술냄새가 났고 가끔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느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누구를 기다렸던 건지도 잊었다. 마지막 기차가 역사를 서고 또 떠난 후 나는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몇 군데 구토 자국이 보였는데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은 분명 춥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곳에 누웠는데 그곳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눈을 뜬 건 굉음 때문이었다. 나는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걸었다. 주위로 사람들이 제법 타고 내렸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호각 소리와 함께 단정한 복장의 남자가 나를 끌어냈다. 나는 그가 내뱉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호의적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리고 해일처럼 한기가 몰려왔다. 집으로 돌아가서 이틀을 끙끙 앓았다. 체온은 재지 않았다. 보나 마나 높을 게 뻔했다.


**


작고 빠르고 난잡한 날갯짓 소리가 붕- 하고 귀를 스쳤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뻗치며 잠이 확 달아났다. 깜빡 잠든 동안 길고 무시무시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옆은 비어있었다. 슬쩍 열린 문틈으로 빛 그림자가 새어 들어왔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곧 보름이었다. 달은 크고 밝았다. 나는 이 구도가 좋았다. 그녀가 어딘가를 보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했다. 서로 마주 보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마주 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놀란 눈이 되었다. 달 옆으로 초록과 빨강, 두 점이 깜박이며 날아갔다. 두 점은 가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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