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30)

30. 선택

by 작가 전우형

30.


희영과 나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미쳤나 봐. 지금 몇 시죠?”

나는 시계를 봤다. 6시 50분.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늘 일요일이에요.”

“편의점이 쉬는 날이 어딨어요!”

희영이 소리쳤다.

“하긴. 영우 씨는 아르바이트해본 적 없죠?”


생활비라면, 벌어본 적이 있긴 했다. 그녀는 대충 세수와 화장을 마친 뒤 핸드백을 어깨에 메었다. 문이 닫히는 모습을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바라봤다. 언제 시트를 교체한 건지, 세탁은 한 건지,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침대였다. 그리고 묘한 냄새들. 나는 주섬주섬 청바지를 당겨 입었다. 샤워실 쪽에서 수증기가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입었던 청바지를 다시 벗었다. 찬물이 다시 데워지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욕실 바닥으로 흐르는 찬물을 피해 나는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조금씩 하얀 김이 피어나는 게 보였다. 손을 몇 번 먼저 찔러 넣은 뒤 나는 머리를 집어넣었다. 침대에 다시 누울까 하다가 서둘러 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말처럼 하루는 쉬는 날이 없었고 값은 비쌌다.


덜 마른 머리 위로 쇠스랑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길가로 아직 녹지 않은 첫눈이 분필 가루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는 살얼음을 피해 걸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한쪽 다리를 들고 벽에 오줌을 쌌다. 몇 걸음 뒤에 할머니가 서있었다. 할머니는 강아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무심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시선을 틀었다. 어디선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오줌 자국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오줌 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할머니와 강아지가 먼저 사라졌다.


희영은 저쪽으로 걸어갔을까? 나는 강아지와 할머니가 나타났던 방향을 보며 생각했다. 이 거리와 시간과 계절은 희영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빨리 걸었다. 낡고 오래되고 위험한 동네였다. 나는 주차된 차 앞에서 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렸다. 서둘러 여관으로 돌아갔을 때 귀찮은 표정의 여관 주인이 우리가 누웠던 침대 시트를 툭툭 털어 다시 펼쳐두는 걸 보았다. 작은 원형 테이블 위에 차 열쇠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머리를 살짝 숙이며 차 열쇠를 얼른 집어 밖으로 나왔다. 탁탁 탁탁하는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


카페인은 신앙처럼 중독이었다. 미래를 당겨 쓰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커피를 마셨다. 살 수만 있다면 지금 모두 다 살아버리고 싶었다. 기다림은 미래의 어떤 시점까지 버티는 걸 전제로 했다.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당기는만큼 그 시점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 뜨거운 불덩이 같은 욕망이 나를 더 빨리 증발시켰다. 희영은 호로록 따뜻한 커피를 삼켰다. 하얀 잔 위로 초승달을 닮은 동백 빛 자국이 남았다. 문득 희영의 입술이 반짝였다.

“선택하는 거래요. 사랑은. 우주를 창조한 이가 하나님이라는 걸 믿는 것처럼요.”


어떤 이들은 그래요. 우주의 기원은 하나의 거대한 폭발에서 시작됐다고. 저도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면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지구라는 은하계 변방의 행성에서 고작 지구가 태양 주위를 100번쯤 도는 동안 살아갈 뿐인 인간이 우주의 신비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우주는커녕 지구의 탄생도 경험하지 못했는데. 믿음은 이 세상이 만들어질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믿기로 했어요. 근사하잖아요? 원인불명의 거대한 폭발로 만들어진 우주에서, 먼지나 부스러기 정도에 불과한 지구에서, 우연에 우연을 거쳐 돌연변이와 진화의 결과로 내가 여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보다는,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의지와 계획을 갖고 이 모든 것을 정성 들여 만들었다는 게 훨씬 더 있어 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비슷해요. 사랑도. 결국 상대가 이러니 저리니 하는 것들은 핑계일 뿐이에요. 그건 그냥 자신이 없는 거예요.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면,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결국은 용기가 없는 거예요. 사랑도, 신앙도.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용기가.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머그잔을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숨겼다. 손이 떨렸다. 아무래도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버겁고 아팠다. 사랑하기로 선택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흔들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강가에 우두커니 앉아 밤을 지새워도, 다리 그림자 아래 숨어 몰래 눈물을 삼켜도,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펜촉이 지면을 긁었다. 잉크가 말랐다. 글씨는 희미해졌다. 희영과 나 사이로 빛과 그림자의 구분이 생겼다. 빛은 그녀를 비췄다. 입술처럼 눈이 빛났다. 희영은 이마를 가리고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하루 중 가장 따뜻할 시간에 나는 땔감이 떨어졌다. 밖에 겨울비가 내렸다. 여우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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