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31)

31. 소낙눈 내린 날

by 작가 전우형

31.


희영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3층 건물 어딘가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까치 두 마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영은 그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까치는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다 깍깍-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희영은 까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까치가 뭐라고 하던가요?”


희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확 내뱉었다. 그리고 나를 흘겨본 뒤 먼저 걸어갔다. 흔했다. 그런 일은. 희영은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었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스쳐 지나는 풍경들 속에서 희영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게 늘 부러웠다.


‘환(環) 무지개’라고 했던가. 희영은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이 속에 무지개가 있다고. 나는 ‘월리를 찾아라’나 ‘매직 아이’를 보는 심정이었다. 심술이 해적 룰렛처럼 튀어 오르려고 할 때 희영은 검지 손가락으로 사진 속 구름을 가리켰다. 구름 뒤에서 무지개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해 질 녘에만 보여요.”


희영은 무지개가 이어지는 방향을 따라 원을 그렸다. 원은 사진 밖으로 뻗어나갔다가 다시 사진 속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끝이 도착한 위치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무지개가 다시 구름 속으로 이어졌다. 무지개는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그런 일은 많았다. 희영은 뱅갈 고무나무에 돋아난 새순을 가만히 만졌고, 금전수 잎이 반짝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사랑목과 장미허브에 돋아난 뿌리를 보여주었고 물기가 남은 화분과 마른 화분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찔러가며 구분해주었다. 나는 하루 종일 머물러도 찾아내지 못하던 것들을 희영은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하나씩 짚어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모르고 지나친 것들을 알아봐 주었다. 그래서 늘 고마웠다.


내게는 그 모습이 천사의 날갯짓처럼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면 연보랏빛 무궁화가 피었고, 곱게 오므라진 꽃봉오리는 마치 개화 직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돌아가는 모습도 아름다운 꽃. 희영은 닫힌 꽃잎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동안 눈을 감은채 서있었다.


“무궁화가 지저분하다는 말은 거짓이에요. 일제가 우리를 욕보이려고 식민지 때 퍼트린 거죠. 가슴 아프게도 아직 그게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무궁화는 끈기를 상징해요. 그래서 오래 피죠. 산천을 물들일 만큼. 무궁화는 저 모습 그대로 꽃대와 함께 낙화해요.”


나는 떨어진 꽃대 하나를 주웠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주인이 사는 집일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울상을 지었다. 희영은 나를 두고 홀로 새처럼 걸어갔다. 나는 계란 쥐듯 주먹을 살짝 말아 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인이 사는 집. 나는 순간 파란 집이 떠올랐다.


희영을 기점으로 나의 세상에는 새로운 꽃들이 피어났다. 까치가 등장하기도 했고, 무지개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볼 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의 언어가 맴돌았다. 몰입하는 표정과 놀라는 입가가 보였다. 특별했다. 공기를 이루는 알갱이 하나하나가 느껴질 만큼. 햇빛이 반짝거리던 단풍길처럼. 소복소복 발자국을 남기던 첫눈처럼. 나는 그녀가 놀라지 않을 거리에서 그녀를 본다. 시간과 시간이 마주치고, 공간과 공간이 아슬아슬하게 겹치는 지점에서. 그녀가 세상에 빠지듯 나는 그녀에게 빠져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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