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34)

34. 달은 외롭지 않아

by 작가 전우형

34.


하늘 위로 산불이 번지는 것 같았다. 구름은 화마의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검고 진하고 어두웠다. 구름이 캄캄한 이유는 수증기가 모여 굳어진 얼음덩어리가 빛이 통과하지 못할 만큼 치밀해져서다. 두껍고 무거운 덩어리들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또 멀어져 갔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허벅지에 올렸다. 원형의 바닥이 닿은 지점을 시작으로 뜨거운 고리 수십 개가 동심원을 이루며 허벅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나는 컵을 꼭 붙이고 있다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을 때 잠깐 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괜찮아지면 다시 올려놓기를 반복했다. 실내인데도 입김이 나왔다. 컵은 이내 식었고 고통과 환희 사이의 어디쯤 되는 미묘한 감각 역시 사라졌다.


나는 벽시계를 봤다. 오후 4시 48분. 나는 뜨거운 물을 다시 채워왔다. 잔을 입술에 대자 따뜻한 기운 하나가 식도를 타고 죽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지독한 한파였다. 밤새 내린 눈은 밑바닥부터 얼어붙어 있었다. 길 건너 종종걸음으로 내려오던 아주머니 한분이 숨은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따르던 청년이 아주머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다가 한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일어난 아주머니는 청년의 손을 놓지 못한 채 한동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청년은 난감한 표정으로 옆을 지켰다. 그 청년은 아주머니를 부축해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까지 함께 걸어 내려왔다. 아주머니는 청년의 어깨를 두드렸고, 청년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 걸어갔다. 요즘 보기 드문 착한 청년이었다.


하늘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가까운 하늘과 먼 하늘. 두 개의 하늘은 겹쳐진 채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이의 틈이 미묘하게 벌어질 때마다 1억 5천만 km 떨어진 곳에서 지구 질량의 33만 배나 되는 불타는 구체가 8시간 전에 쏘아 보낸 빛이 마구잡이로 갈라지고 흩어지며 대지로 곤두박질쳤다. 그 조각 중 하나가 순간적으로 나를 스친 뒤 사라졌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눈은 우박이 되었다가 다시 함박눈이 되었다. 함박눈은 바람을 타고 춤을 췄다. 곧 폭풍 같은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 눈보라를 뚫고 은색 세단 한 대가 나타났다. 전조등은 왼쪽, 안개등은 오른쪽만 들어온 그 세단에서 희영이 내렸다.


“세상에!”

성애 낀 문을 열고 들어온 희영은 외마디 비명처럼 이 말만 내뱉은 뒤 입구에서 모자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었다.

“앞이 안 보여요. 앞이!”

나는 가스난로를 희영 쪽으로 돌려주었다. 희영은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친 뒤 가스난로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희영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커피 한잔만 줄래요?”

나는 빨간 장미 세 송이가 그려진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담았다.


“히터 켜고 오지 그랬어요.”

“알잖아요. 답답해서 못 트는 거.”

나는 희영 앞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첫 잔이네요.”

“정말? 어쩌다?”

희영은 눈을 치켜떴다.

“매일 커피만 마시다 보면 멍해지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제 안 마시려고요?”

“병든 닭처럼 앉아있다가 좀 전에 깨달은 거죠. 아. 오늘 내가 커피를 안 마셨구나. 그래서 그렇게 재미가 없었구나.”

“이미 중독이에요. 그거.”

"커피 마시는 낙이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하긴."


희영은 검은색 단화를 벗고 발을 뻗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희영에게 물었다.

“엊그제 달 봤어요?”

희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옆에 화성이 같이 보였대요. 친구처럼.”

“영우 씨는요?”

“보긴 했지만 그게 화성인 줄은 몰랐죠.”

“금성은 아니고요?”

“거의 보름달에 가까웠으니까 금성일 수는 없어요.”

희영은 잠시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의 표정이었다.


한참 후 희영은 여전히 같은 표정인 채로 물었다.

“왜요?”

“보름달은 달의 위치가 태양-지구-달 순서일 때의 모습이니까요. 화성이 가까이 보였다는 건 태양-지구-달, 그리고 화성이 순간적으로 일직선에 가까웠다는 말일 테죠.”

“그럼 금성은요? 금성은 보름달이랑 가까워질 수 없어요?”

“네.”

“그렇군요.”

“달이 그믐이나 초승일 때.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그것도 엄청 오랜만에 둘은 스치듯 마주치겠죠.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외롭겠어요.”

“누가요?”

“금성요.”

“그럼 달은요?”

“... 오늘은 달이 안 뜨겠죠?”


나는 그녀를 따라 밖을 쳐다보았다. 짙게 내린 어둠 사이로 노란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비췄다. 그 옆으로 여전히 휘몰아치는 눈발이 보였다. 몇 개의 간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원호의 빛무리와 가로등이 비추는 좁은 공간, 그리고 간혹 미끄러지듯 도로를 비추는 전조등 사이로 그 눈발들은 기세를 이어갔다. 나는 말했다.

“그래도 달은 있어요. 우리가 볼 수 없어도.”

“하지만 우리에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어차피 각자의 궤도를 돌 뿐이에요. 둘이 만난다거나 가까워진다거나 하는 건 다 허상이에요.”

“그럼 시무룩할 것도 없겠네요. 어차피 가까워질 수 없을 테니.”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희영에게 내밀었다. 희영은 핫팩을 받아 손에 꼭 쥐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 왜 세상 다 잃은 표정이에요? 매출이 엉망이라서요?”

나는 가만히, 차갑게 식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냉기가 찬찬히 손끝을 맴돌았다.

“아뇨. 커피를 안 마셔서 그래요. 그런데.”

"그런데?"

"그러다 불붙어요."

"어맛!"

희영은 가스난로 앞으로 뻗고 있었던 발을 얼른 접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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