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전송
35.
희영을 먼저 보내고 나는 미리 시동을 걸어둔 차를 탔다. 뒷유리의 얼음은 열선이 녹였으나 앞유리는 아직이었다. 와이퍼를 움직여 보았으나 얼음 위로 헛돌며 고무 재질의 밑단만 덜그럭거릴 뿐이었다. 나는 내려서 유리에 얼어붙은 눈들을 한참 긁어냈다. 다시 차에 타자 겨우 훈기가 느껴졌다. 선명한 입김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앞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붉고 노랗고 하얀 깔때기들은 살얼음판 위를 느릿느릿 기어갔다. 발목까지 쌓인 눈은 삶은 감자처럼 밟히고 으깨어져 곳곳에 진창을 만들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열었다. 날씨 알림 창에는 [평택시 : 영하 10도, 체감 17도.], 재난문자에는 [중부와 서부지역 대설주의보, 한파 경보 발효]라고 쓰여 있었다.
다시 시작된 눈보라는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출발하기로 했다. 로터리를 두 번쯤 지나 우회했을 때 나는 밖에 내어둔 화분들이 생각났다. 그대로 두면 모두 얼어 죽을게 분명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살폈다. 극심한 눈보라에 어스름까지 짙어진 탓에 주변을 살피기 어려웠다. 저 앞으로 희미하게 빨간 신호가 보였다. 신호등은 눈에 덮인 채 쉴 새 없이 휘청거렸다. 빨간 신호는 기울어진 반달 모양으로 빛났다. 나는 반대 차선에 가지런히 대기 중인 불빛들을 침침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운전대를 돌렸다. 돌아가는 길은 정체가 심했다. 군데군데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멈춰 선 차들이 보였고 레커차들은 경광등을 번쩍이며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눈 덮인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신호를 여섯 번쯤 받고서야 겨우 카페로 이어지는 한적한 왕복 일 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불 꺼진 카페 앞에 나란히 세워둔 화분들은 이미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맨손으로 쌓인 눈을 대충 털어냈다. 그리고 화분을 두세 개씩 거머쥐고 카페 안으로 옮겼다. 작은 잎에 서리처럼 붙은 얼음 알갱이들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화분을 카페 가운데로 모으고 그 앞에 가스난로를 켰다. 그리고 옆에 쪼그려 앉아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하며 녹였다. 빨갛게 익은 손가락들은 마디마디에 얼음이 낀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너희만 놓고 갔다니. 등골이 오싹했다. 추위는 정말 무서웠다. 선연한 생명의 위협 앞에 서면 자존심이나 체면을 챙길 여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바꿔 말하면 아직 재거나 따질게 남아있다면 그는 절박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다이어트며 식단 조절이라는 말이 습관처럼 오르내리는 시대였다. 풍요라는 괴물은 소중했던 것들을 더 이상 소중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넘치는 사랑에 둘러싸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딸랑거리며 유리문이 열렸다. 두 젊은 미국인 커플은 따뜻한 히비스커스 차 두 잔을 주문했다. 남녀는 창가 쪽 이인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스난로를 두 사람 앞으로 옮겨주었다. 둘은 서양 사람 특유의 해맑은 얼굴로 인사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숙인 뒤 주방으로 왔다. 잘 말린 히비스커스 잎을 망에 담고 끓는 물을 부었다. 두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손으로 감싼 채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이 미국인이며, 커플이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내게 자기소개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저 그렇게 퉁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온종일 추위에 떨다 보면 허기가 소복소복 쌓였다. 몸에 쌓인 건지 마음에 쌓인 건지 모를 그 허기들이 일정 이상 차오르면 힘겹게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서서히 멈추는 걸 느낀다. 그리고 사고의 모든 끝이 휴식이라는 두 글자를 겨눈다. 나는 고요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본다. 모든 걸 접어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달아나듯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각양각색의 불빛들과 다시 쌓여가는 자동차 위의 하얀 눈. 나는 정말 그 사람을 기다렸던 걸까. 아니면 기다림을 흉내 낼 뿐이었던 걸까. 기다렸던 누군가와의 대면이 식은 커피처럼 아무 감흥도 없을 때 의심은 여지없이 꽃 피곤했다. 어쩌면 희영에게도 나란 존재는 저기 앉은 젊은 미국인 커플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