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감각
36.
희영은 내게 힘들다거나 도와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희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희영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던 날, 나는 평소 그녀가 내리던 버스 정류장에서 네 시간 반을 기다렸다. 어디로 떠난다는 연락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64번 버스는 30분에 한 번씩 도착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타고 도착한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은 버스에 오르며 가끔 나를 뒤돌아봤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반으로 접혀 있던 문을 펼쳤다. 버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나는 버스가 떠난 도로의 한 부분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뻗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꼭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같은 날 같은 버스기사 아저씨를 다시 본건 오후 다섯 시 십칠 분이었다. 그 아저씨는 나를 알아봤을까? 아직 64번 버스는 열 번 더 정류장 앞에 설 것이다. 하지만 오늘 저 버스기사를 다시 볼 일은 없다. 나는 하얀 매연을 내뿜으며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 성애 낀 뒤창에 다섯 개의 축구공처럼 보이는 까맣고 큰 점들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길 바라며. 빨간 후미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을 나와서 걸었다. 겨울은 해가 빨리 저물었다. 그래서 겨울의 하루는 짧았다. 원래 나는 여름을 좋아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겨울이 좋아졌다. 희영이 추운 날을 좋아한다고 말한 뒤로 계절에 대한 기호가 바뀌었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나는 이전 정거장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간 만큼 다음 64번 버스와의 간격은 짧아지겠지. 하지만 나는 걸어가는 동안 64번 버스 두 대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한 정거장 거리가 그토록 멀 줄이야. 역시 시골이었다. 그리고 헤어짐은 만남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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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었을 무렵 나는 미뤄두었던 질문을 해부해보기로 결심했다. 그 질문이란 그녀와 내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감각은 과연 ‘진짜’였는가? 였다. 이를 위해서는 ‘진짜’라는 단어의 정의를 찾아봐야 했다.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 ‘진짜’라고 입력하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진짜] 1. 명사. 본뜨거나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참된 것. 진짜 도자기. 2. 부사.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으로. 영화가 진짜 지루하다.
이제 대입해 보자.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행운은 나를 비켜갔다.’고 썼던 페이지가 바로 펼쳐졌다. 한 장을 넘겼다. 그 페이지에는 ‘나는 세상에서 남자가 제일 싫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또 한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생일은 역시 재수 없는 닐이야.’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두장을 연거푸 넘겼다. 드디어 빈 페이지였다. 나는 일기장의 가운데를 쫙 펼쳐서 몇 번이고 꾹꾹 눌렀다.
질문 1. 그녀와 내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감각은 과연 ‘진짜’였는가?
대입 1. 그녀와 내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감각은 과연 ‘본뜨거나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참된 것’이었는가? →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대입 2. 그녀와 내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감각은 과연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참’이었는가? → 그런 것도 같은데?
질문 2. 그런데 감각에 진짜가 있을까?
나는 다시 인터넷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감각] 1. 명사.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감각이 둔하다. 2. 명사.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 패션 감각.
나는 질문 2. 아래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질문 2. 그런데 감각에 진짜가 있을까?
대입 1. 그런데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리는 것’에 ‘본뜨거나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참된 것’이 있을까? →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진짜인 거지.
대입 2. 그런데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에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참’이 있을까? → 역시 판단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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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과 내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앉아,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들었다는 건 의심할 바 없이 진짜였다. 이런 감각마저 반추 끝에 확신할 정도라면 나는 얼른 정신과 문을 두드리는 게 신상에 이롭겠지. 하지만 그 순간 그녀와 내가 동일한 감각과 그에 대한 해석의 결과를 공동으로 소유했는가, 혹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느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희영을 다시 만나지 않는 한 미제로 남을 것들. 그러나 나에게는 ‘진짜’라고 여겨졌던 것. 그것들은 차가움이나 뜨거움, 절반만 남은 사진, 연도만 지워진 날짜와 시간이 기록된 페이지, 종이가 접힌 방향과 위치, 끝이 날카롭고 깨어진 음악 소리, 흰색 혹은 베이지색 혹은 오트밀 색 양말, 옷을 껴입을 수 있을 만큼 껴입은 채 웅크린 오후 등으로 시간의 연대표에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희영의 곁을 맴돌던 허전하고 외로운 공기를 기억한다. 나는 희영과 함께 녹슨 컨테이너 아래에 웅크린 가을을 기억한다. 거기서 눈이 예쁘고 겁이 많은 강아지의 목과 다리에 친친 감긴 쇠 목줄을 풀던 여름 저녁을 기억한다. 으르렁거리던 강아지의 입을 잡으려다 생긴 손등의 선명한 점 다섯 개와 온종일 해가 없던 하늘에 들불처럼 번지는 붉은 해일을 바라보던 저녁을 기억한다. 온종일 귤 두 개밖에 먹지 못한 날 포장마차에서 새어 나오는 매콤한 어묵탕 냄새에 이끌리듯 꼬치어묵을 집어 들어 희영에게 내밀던 시장 골목을 기억한다. 이 모든 순간들이,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들이 비록 우연에 불과했더라도 나는 그녀에게서 안도를 느꼈다. 그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귀에 익은 사투리가 들렸을 때나 일주일 만에 뺑소니 사고 가해자 신원을 확인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놀랍고 짜릿하고 모호했다.
나는 한참 동안 손을 비볐다. 이 정도 비볐으면 손에 불이라도 붙어야 할 것 같은데. 한번 싸늘해진 손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예전에 생존형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새로 참가한 남자 대원이 호기롭게 나무에 불을 피우는데 도전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난 지점에 옅은 그을음만 남았을 뿐 제대로 된 연기조차 피우지 못했다. 그가 얼빠진 얼굴로 비켜선 뒤 ‘족장’으로 불리던 단단한 인상의 남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나무판을 고정하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자세로 세차게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이제 막 개화한 열꽃처럼 불씨가 돋아났다. 족장은 얼른 마른 건초로 불을 키우며 제법 큰 나뭇잎으로 바람을 만들었다. 대원들의 탄성과 함성이 이어졌다.
나는 손을 비비던 것을 멈추고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겐 그런 족장스러운 능력은 없는 것 같았다. 오른손이 더 차가운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오른손을 목에 갖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릴 때 친구들은 장난 삼아 목이나 볼에 손을 갖다 대거나 옆구리나 등에 손을 집어넣곤 했다. 나는 차가움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아서 몸을 비틀었고, 그러다가 책상다리에 걸려 뒤로 나자빠질 때도 있었다. 그러면 친구들은 더 재밌어서 나를 놀리곤 했다. 나는 어깨와 가슴을 오가며 손을 녹였다. 조금 더 용기를 내 아랫배에도 손을 갖다 댔다. 이상하게도 참을만했다. 서늘함과 열기가 공존하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헤어졌다는 진실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옆에 아무도 없다는 감각으로부터도. 밖에는 또 지긋지긋한 눈보라가 일었다. 나흘째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