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37)

37. 블랙홀

by 작가 전우형

37.


한 줄, 또 한 줄, 나는 시간을 그린다. 선이었던 시간은 하나의 면이 된다. 나는 시간을 그린다. 나는 먼저 그린 시간 위에 새로 그린 시간을 놓는다. 나는 시간을 그린다. 나는 두 개의 시간 사이에 새로운 시간을 넣는다. 시간이 충분히 쌓이면 구멍을 내어 기억으로 묶는다. 나는 시간 뭉치를 튼튼한 상자에 넣고 잠근다. 나는 상자의 비밀번호를 그에게 준다. 그는 그게 비밀번호라는 걸 모른다.


나는 시간을 그린다. 선이었던 시간은 하나의 면이 된다. 나는 상자 앞에 선다. 시간 뭉치를 들고서. 나는 그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시간을 새로 그린다. 선이었던 시간은 하나의 면이 된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다.


‘나는 ‘너’라는 맥락 안에 숨 쉬고 싶어. 우리의 혈관에 서로 연결되길 원해. 너의 피가 나를 거치며 정제되면 좋겠어. 거슬러진 불행들만 내게 남도록.’


쓴 문장을 지운다. 다시 쓰고 또 지운다. ‘불행’이라는 두 글자만 남는다. 나는 ‘불행’을 안은 채 그녀를 기다린다. 하얀 지평선 끝에 아른거리는 점 하나를 바라본다. 그 점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결국 상자에 넣지 못한 시간은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너덜너덜한 기억 뭉치로 남았다. 나는 이제 그 기억들이 불행의 마지막 페이지였는지 아니면 상자에 귀속될 시간의 일부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에 이끌린다는 뜻이다. 겨울에는 중력이 있었다. 그 중력은 겨울의 중심으로 계속해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여전히 겨울이 좋았다. 그건 어쩌면 내가 아직 겨울의 중력장 안에 머물러서일지도 몰랐다.


희영을 만나기 전까지 겨울은 내게 낯선 계절이었다. 겨울은 12월의 시작과 함께 명백하고 혹독한 추위를 몰고 왔다. 나는 낯선 계절의 경계에서 몸을 움츠려야 했다. 겨울은 매년 돌아왔다. 그러다 겨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만났다. 눈밭 위로 한 사람의 흔적이 새겨졌다. 그 흔적은 서서히 뻗어나가며 회색 선이 되었다. 나는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흔적이 시작된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흔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급히 돌아보았다. 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를 뒤따르던 회색 선 또한 설원의 일부처럼 희미해져 갔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눈밭을 달리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고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는 그렇게 겨울의 중심을 빠져나왔다.


희영은 내게, 겨울을 두려워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뒷걸음질 쳐도 소용없어요. 어차피 계절은 우리를 금방 따라와요. 시간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빨리 계절을 벗어나는 방법은 계절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계절의 중심에 도착하면 계절은 우리를 따라오던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하거든요.”


희영은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분명 그때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그냥 그 계절을 좋아하면 돼요. 영우 씨는 겨울이 가장 싫다고 했죠? 그럼 겨울이 가장 길거예요. 이제부터라도 겨울을 좋아하세요. 그럼 영우 씨는 겨울의 중심에 서게 될 거고, 겨울은 금세 도망갈 거예요.”


나는 희영의 말처럼 겨울을 좋아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희영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내가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겨울의 중심에 도달했을 때, 겨울만 남고 희영은 사라졌다. 그때 희영은 이렇게 말했다.


“블랙홀은 중력이 너무 강해서 빛도 소리도 모두 삼켜버린대요. 그리고 블랙홀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천천히 흐른대요. 저는 가끔 그런 블랙홀이 제 앞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나 봐요.”


뻗어나간 말이 어디에서도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때. 모든 언어들이 무한히 멀어지며 돌아오지 않을 때.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주목할 내용은 후자였다.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나는 겨울의 중심으로 갈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걸 느꼈다. 희영은 늘 겨울의 중심에 서있었다. 희영의 겨울 옷차림은 울 원피스에 기모 레깅스 또는 하늘색 코르덴 바지 중 하나였다. 그 위에 가을보다 조금 두꺼워진 코트에 목도리를 걸칠 뿐이었다. 나는 희영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의 중심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중심으로 가면 달아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이 느려진다는 건 내겐 사후의 개념이었다. 시간은 그 당시에는 빨라진다거나 느려진다는 걸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갑자기 시간이 훌쩍 지나있거나 혹은 아직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나는 희영을 따라 공주 중동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녀와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신은 얄궂었다. 신은 내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다만 희영과 함께 한 시간을 일시적으로 길게 늘어트렸을 뿐. 그래서 겨울은 내게 일 년 중 가장 긴 계절이 되었다.


**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월요일. 우편함에는 봉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봉투를 손에 쥐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펼쳤다. 두 사람의 이름만 담백하게 쓰인 하얗고 딱딱하고 두꺼운 종이. 기다렸던 편지가 도착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동반자, 인연, 사랑, 축하 따위의 공허한 단어가 생략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장소는 공주 중동성당이었다.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해 여름(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