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에덴동산의 기적
38.
“사랑이 변하지 않는 감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고민할 이유도 없겠죠? 내가 정말 사랑하는지 아닌지.”
그러나 희영의 확신은 종종 허물어졌다. 그녀의 사랑은 마치 외국어 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의미를 알 것 같다가도 해석을 시작하면 첫 단어에서부터 막히곤 했다. 희영의 낙심은 밤새워 우는 아이를 달래다 지친 엄마처럼 깊고 끝이 없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요. 분명 뭔가 있는데. 나는 그게 필요한데. 힘들어요. 다들 내게 원하기만 해. 어디에도 나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어.”
희영의 머리 위로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해는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가속이 붙었다. 붉은빛으로 달아오른 구름은 지면에 곤두박질치는 해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듯 이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그곳을 바라봤다. 차라리 눈이 멀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외롭고 허탈한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눈부실만큼 선명할 때가 있어요. 나를 향한 선의나 악의,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속도, 모래 알갱이가 밟히고 미끄러지는 소리, 어떤 때는 시간의 흐름까지도요. 바로 옆에 있어도 느끼지 못했던 것들. 나는 그 속에 있다는 걸 분명히 느껴요. 성호 씨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준 사람이에요.”
성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때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내게는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희영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나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부럽지 않아요. 그래서 누가 부러운 건 그 사람이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가졌기 때문이래요. 그런데 가질 수 없는 게 대체 뭘까요? 나는 궁금해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도 늘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아가잖아요? 모두 속은 빈털터리인 거예요. 다 가진 척 해도 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거예요. 빈 껍데기 목각인형처럼. 인형의 웃음은 조각한 가짜니까요.”
가을에 함께 주운 낙엽이 책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물감이 마르듯, 시간이 염료를 연하게 하듯, 희영의 눈동자의 열기도 희미해졌다.
“가까이 갈수록 만질 수 없는 이 느낌은 뭘까요? 선명하던 것들이 자꾸 흐려지는 것 같아요.”
나는 공주 중동성당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밤의 어둠도 그곳에서만큼은 색을 달리하는 것 같았다. 길 건너 충남 역사박물관이 보였다.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보이는 것들처럼 어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도 다다라야만 하는 지점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내가 볼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즈음 나는 실어증을 앓기 시작했다. 말을 하려고만 하면 입이 본드로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다 포기하고 나면 속에서 불같은 기운이 치밀었다.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꼴이라니. 하지만 말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있는 말 없는 말들을 쉼표 없이 떠들다 보면 나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문 앞을 서성이던 그림자를 밟은 것처럼. 자꾸 놀라던 희영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문 뒤에서 한참을 서성인 시간들처럼. 희영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에덴동산은 어디쯤일까요?”
희영은 졸린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렸고 열린 틈으로 바람이 불며 희영의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희영은 앞머리조차 만질 수 없을 만큼 힘이 없어 보였다. 나는 대답했다.
“음... 알아도 갈 수 없는 곳?”
“거긴 생각만 하면 원하는 게 짠 하고 나타난대요. 부끄러운 것도 없고 그래서 감출 것도 없었대요.”
나는 잠시 그런 장소를 떠올려보았다. 매일 비치파티가 열리는 특급호텔 정도면 될까? 새벽처럼 혼곤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재미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희영은 눈을 감았다.
“저 같은 사람은 안 받아줄 것 같아요.”
숨길 게 많은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지 않겠지. 희영의 숨소리가 잔잔해졌다. 나는 열려있던 창문을 닫았다. 차 안은 고요해졌다. 희영은 꿈속에서 에덴동산에 도착했을까. 나도 눈을 감았다.
나는 속도를 높였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선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시간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아버지가 될 때와 달리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는 건 어쩐지 서글펐다. 아버지는 마치 그가 내가 알던 자식이 맞냐는 듯이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려 애썼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손은 거칠고 뜨거웠다. 나는 거기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계란 흰자처럼 온통 하얗고 미끌거리는 것 같았다.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내달렸다. 그곳은 분명 에덴동산이었다. 거기에는 스쳐 지나갈 뿐인 사람들과 순간들, 그리고 희영이 있었다. 단절된 시간이 모여드는 곳. 한없이 머무를 수 있는 곳. 이제 울지 않는 희영을 대신해 나는 울었다. 누군가 눈물을 훔쳐갔다. 나는 눈을 떴고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던 희영과 눈이 마주쳤다. 희영의 눈은 슬퍼 보였다. 떨림이 추스러지지 않았다. 희영은 내게 묻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말들에 답하는 법을 잃었다. 우리는 공주대교로 갔다.
“힘들어 보였어요. 출발하기 전부터. 새삼스레 감추지 않아도 돼요.”
“...”
“우는 소리가 예뻐요. 괜찮아요. 여기서는 그래도 돼요. 눈물들은 모여서 강이 된대요. 구름도 되고 바람도 된대요. 그러니까 울어도 돼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걸 돌려주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나는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희영이 말했다.
“거 봐요. 멎었죠? 눈물도 돌려주려니까 아까운 거예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혼자 울지 않아도 되거든요. 울다 잠들어도, 잠들지 않아도 아침은 와요. 눈부시도록 슬프지만 괜찮아요. 해가 아프게 반짝일 때도 시간은 가요. 둥둥 떠다니는 알갱이들이 눈동자에 부딪혀요. 너무 감상적인가요? 여기, 이 공간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요.”
나는 그 순간만큼은 희영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