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도피
39.
몇 가지 일들이 겹쳐 바쁜 날이었다. 개지 못한 채 쌓여가는 빨래 바구니처럼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눌리고 구겨지고 퀴퀴한 냄새가 뱄다. 퇴근길에 운전대를 잡고 창밖을 보는데 라디오에서 엄마 카드를 훔쳐 가출한 초등학생 얘기가 들렸다. 아이 엄마가 카드 분실 신고를 한 탓에 11살 아이가 택시비를 카드로 결제하다가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아이에게 가출한 이유를 묻자 아이는 엄마가 강제로 학원을 여섯 개나 끊어줬는데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가출을 결심했다고 대답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나 나나 참. 위안은 그런 식이었다. 일종의 ‘고생감’이라고나 할까. 집에 도착해서 씻고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축축한 속옷을 갈아입고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누워서 잠이 안 오네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시곗바늘에 치이듯 하루를 살다 보면 세상은 둘로 나뉜다. 오늘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과 내일로 미뤄도 되는 일. 그래서 빌보 뉴웨이브 크리스마스 에디션을 보러 모던하우스에 간다던가 혼자 사는 엄마의 소식이나 안부를 묻거나 하는 일들은 일제히 내일로 밀려난다. 그런 내일은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지만 헤엄치고 헤엄쳐도 여전히 그 자리인 쥐섬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막상 내일이 되면 또 그다음의 내일로 자동 업데이트 되어 있다. 그래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원형 접시 위에서 세차게 자전하는 찻잔에 앉아 놀이기구 밖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를 바라볼 때처럼 어지럽다.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면 아이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손을 슬며시 거둔다.
희영에 대한 생각은 새순처럼 잘린 가지에서 파릇파릇하게 솟아 나왔다. 희영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눈 내린 운동장처럼 덮을 때 나는 시간을 자주 확인했다.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나뉘었다. 멈추었으면 하는 시간과 어서 지나갔으면 하는 시간으로. 어서 지나갔으면 하는 시간이 되면 나는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떠오르는 내용을 쓰기 시작했다. 네 번째 수첩의 마지막 줄을 채웠을 무렵 나는 그것들을 컴퓨터로 옮겼다. 의미를 갖기엔 터무니없이 조악한 내용들이었다. 다만 그 작업은 시간을 조금 덜 무겁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면 덜 외롭고, 또 덜 괴로웠다.
술자리에서 내 얘길 들은 친구는 그건 도피라고 말했다. 나는 여행이라고 반박했다. 친구는 여행은 멀어지는 거지 너는 가까워지려고만 하잖아라고 말했다. 가까워지려는 게 아냐. 나도 살려는 거지. 친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혼자서 잔을 세 번 비웠다. 나는 어슴프레 멀어지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