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겁쟁이
40.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를 앞에 둔 기분일지도 모른다. 열고 싶은 마음과 열고 싶지 않은 마음. 두려운 마음과 두렵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터진 은행 열매를 피해 걸을 때만 옆에 은행나무가 있다는 걸 안다. 빈 원두 병을 옆에 끼고서 곡예사처럼 양팔을 벌리고 휘청이며 균형을 잡는다. 겁이 많은 나는 그게 어울린다. 싫어도 별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변화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안다. 계절의 변화가 그렇듯이 나는 움직임이 둔해졌고 어깨와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나이 들지 않고도 나이 든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몸이 움츠러들자 마음도 비좁아졌다. 받아들일 수 있는 무심함의 총량도 급격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관심받지 못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단어가 온통 하얀색인 것처럼. 빈 노트에 흰 글씨를 쓴다. 그 문장은 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읽을 수 없고 담을 수 없다. 구멍 난 항아리처럼 빠져나가서 사라진다.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라디오처럼 지지직거린다.
"나는 하루하루 끼니 걱정하며 사는 게 좋아요."
"그게 가장 위대한 거 아닌가요?"
"위대한 게 아니라 절실한 거예요. 절실함은 위협을 양분 삼아 피어나는 꽃과 같아요. 나는 지금이 좋아요. 꿈이나 욕심, 목표 없이도 살 수 있거든요.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하루를 살아내는 걸로도 만족할 수 있는 내가 참 마음에 들어요."
희영의 곁에는 잔잔하게 맴도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해부하고 싶었다.
"부러워요. 이해받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그건 아마 축복일 거예요.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기분으로 살아보고 싶어. 하지만 가능한 걸까요? 누군가의 마음을 타인이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아. 그렇지 않나요?"
나는 앉은 채로 회전의자를 돌렸다.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는 마찰계수가 0인 것처럼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나는 어지럼증을 견딜 수 없을 때쯤 발을 바닥에 디뎠다. 내가 멈춘 것과 상관없이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한참 동안 더 이지러졌다가 스태인드글라스처럼 조각조각 맞붙었다. 희영은 그런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나는 어떨 것 같아요?"
"어지럽겠죠."
"틀렸어요. 토할 것 같아요."
나는 정말로 입을 틀어막았다. 희영은 얼른 일어나 내 등을 쓸어내리며 주먹으로 탁탁 쳤다. 나는 몇 번이고 침을 삼켰다. 희영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내게 눈을 맞췄다.
"괜찮아요?"
"안에 고인 채 썩어가는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은 냄새가 정말 고약하죠. 그래서 이렇게 한 번씩 섞어줘야 해요."
"설마 그래서 방금 그런 거예요?"
희영은 입을 막았다. 웃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눈동자였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지 못해서 그래요. 알려주지 않으면 어차피 알아낼 수 없어요. 그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희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도 선채로 빙글 하고 한 바퀴를 돌고 비틀거렸다.
"이게 무슨 효과가 있단 거죠? 어지럽기만 한데?"
나는 희영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차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지금까지 이걸 따라한 사람은 희영 씨가 처음이에요."
"정말요?"
희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 순간 척추를 따라 찌르르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 그 느낌은 얼음을 속옷 안에 넣었을 때처럼 갑작스럽고 놀랍고 선명했다. 희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번 무너져보고 나면 겁이 많아져서 그럴 거예요.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겁나고, 다시 본다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지 겁나고, 좋아한다 해도 그 사람이 아직 혼자일지 겁나고, 혼자여도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살아보기 전에도 모르고... 살아본 다음에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인 걸요. 왜냐면 그건 정말 헤아릴 수 없는 운의 집합체였을 테니까. 차라리 몰랐다면 그때처럼 재지 않고 뛰어들 수 있었겠죠."
희영은 연보라색 수첩을 펼쳤다. 그 속에서 마른 단풍 낙엽이 페이지와 함께 펼쳐졌다. 늦은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나는 눈을 가렸다. 낙엽 하나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희영은 그것을 주워 수첩에 다시 꽂았다.
"낙엽은 다시 태어나요. 그건 희망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하지만 사람은 달라요.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자석은 아닌가 봐요. 어쩌면 평생에 한 번 뿐일지도 모르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