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42)

42.

by 작가 전우형

42.


한편으로 나는 사정없이 뒹굴고 있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독특한 느낌과 함께. 안전벨트가 풀려 있었던 탓에 차에서 튕겨져 나온 것 같다고. 호감가지 않는 인상의 사내가 말했다. 혹시 죽으려 했던 거냐고. 그럼 그 각오가 오히려 당신을 살린 것 같다고. 나는 나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투로 말하는 그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나의 처지는 달라질 게 없었다. 나는 살인자다. 이 말보다 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기억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억하는 일과 그리운 이를 기억하는 일은 다른 모양이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진다면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까? 그건 알 수 없다. 원래부터 몰랐던 사람과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바닥을 확인하려면 구정물을 걷어내야 한다. 머리 뒤에 수도꼭지 같은 게 있다. 이걸 돌리면 굳어있던 기억이 흘러나올 거야. 나는 바닥을 확인해야 해.


“해는 마지막 순간이 가장 예뻐요.”

희영은 군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배고플 때 먹는 고구마처럼 세상을 환하게 밝혀줘요. 그러곤 곧 사라져요. 내가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허전한지 한번 느껴보라는 것처럼요. 외로운 거랑은 달라요. 외로운 건 옆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허전한 건 있다가 없어진 거고요. 둘은 일란성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달라요. 그러니까 외로워하지 말아요. 그럼 다시 볼 수 있어요.”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택배 상자처럼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멀어져 갔다. 나는 운전대에 손을 얹은 채로 중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안간힘을 써도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걸 늦출 수 없었다. 심장이 두드릴 때마다 기억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벽화는 점차로 선을 잃어 갔다.


“오늘 개기월식이 있대요. 저녁 6시쯤이면 시작된대요.”

월식이라. 나는 필터를 교체한 정수기의 물을 빼던 중이었다. 물줄기는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것도 개기월식 탓인가. 교체하기 전에는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것 같은데. 어디가 잘 보일까? 나는 문을 밀고 나가서 서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저물었지만 짙은 노을은 여전히 하늘의 맨 아래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들불처럼 번지던 낮의 몸부림도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 빈자리를 군청색 하늘이 빠르게 메우는 게 보였다.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달과 태양 사이에 지구가 위치하면 서서히 지구의 그림자에 보름달이 가려지겠지. 동그란 떡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듯.


희영은 손을 뻗어 푹 꺼진 어두운 들판을 가리켰다.

“여기도 사람들이 살았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 이제는 터만 남았지만.”

희영은 동그랗고 큰 원을 허공에 그렸다.

“불빛이 많았어요. 몇 집은 밤에도 꼭 노란빛이 새어 나왔어요. 저도 그랬어요. 불을 다 끄면 너무 무서웠거든요.”

희영은 바닥을 보며 작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이토록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이. 이제 숨이 트이는 것 같아요. 밤공기가 나를 채워주는 것 같아.”

희영은 숨을 한껏 들이켰다.

“가득 차 있어도 무언가에 가려져서 빈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저 달처럼요.”

희영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보름달이 있었다. 보름달은 서서히 작아졌다. 희영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턱을 괴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좋아요. 눈 감으면 사라질 세상 같은 건 너무 허무하니까요. 멀어질수록 우린 서로를 볼 수 없게 될 거예요.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가로막겠죠.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린 외롭지 않을 거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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