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44)

44.

by 작가 전우형

44.


“그 옷.”

희영은 내 가슴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해에도 그 옷이었어요.”

후드티 말인가. 자주 입는 옷이기는 했다.

“작년 11월 3일에도 성호 씨는 그 옷을 입고 있었어요.”

나는 작은 탁상 달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1월 3일은 어제였다. 그때도 우리가 같이 있었던가.

“별 걸 다 기억하네요.”


희영은 탁상 달력을 한 장씩 거꾸로 넘기며 날짜를 셌다. 시월은 삼십일일. 구월은 삼십일. 팔월은 삼십일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희영은 유월은 삼십일, 하고서는 달력을 넘기는 걸 멈췄다. 희영은 하나의 날짜를 손으로 짚었다.


6월 14일.


희영은 그 날짜에 동그라미 친, 끝이 서로 만나지 않는 빨갛고 굵은 선을 가만히 매만졌다. 희영은 시선을 꼿꼿하게 거기 못 박은 채로 물었다.

“이때쯤 우린 뭘 하고 있었을까요?”

나는 흘끗 그녀의 시선이 닿은 자리를 훔쳐보다가 뜻 없는 웃음을 흘렸다. 희영은 굳은 낯빛으로 나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뭐가 우습죠? 내 질문이? 아니면 생일조차도 기억 못 하는 내가?”


아무것도 우습지 않았는데. 나는 변명하듯 둘 중 어느 쪽이 더 우스웠을지를 생각해야 했다. 이제 상처받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다가 ‘상처’라는 단어를 수없이 떠올렸던 것처럼.


“초를 세고 있었어요.”

나는 생각을 하나씩 다져나가듯 힘겹게 몇 단어를 조합했다.

“아무리 봐도 부족해 보였거든요. 그러다 성냥개비가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자 초의 개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케이크에 불은 붙였나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결국 라이터를 사러 편의점으로 갔죠. 그리고 편의점 입구에서 흡연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담은 온갖 혐오스러운 사진들로 도배된 담배 진열대를 봤어요. 어처구니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검고 어둡고 입구가 비탈길처럼 정돈되지 않은 흉터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거든요. 가슴만 쓸어내리던 내가 답답했는지 편의점 점원이 심드렁하게 물어왔어요. 소화제 드려요? 하고. 나는 그때서야 이유도 모른 채 사과하고 도망치듯 편의점을 빠져나왔죠. 돌아오는 내내 그 사진들이 떠올랐어요. 사실 처음 그 담배 진열대를 봤을 때 굉장히 화려하지만 위화감이 느껴졌거든요. 작은 사진들을 이어 붙여 만든 커다란 얼굴처럼 그건 하나의 작품 같았어요. 그러다 갑작스럽게 모든 게 한꺼번에 바뀌었어요. 숨이 멎을 것 같았죠. 그리고 나를 보는 희영 씨의 당황스럽고 웃음을 참는 눈길을 마주했을 때도요. 희영 씨가 성냥은요? 하고 허망한 목소리로 나와 초만 듬성듬성 꽂힌 고구마 케이크를 번갈아보며 물은 다음에도 나는 한참을 더 생각하고 나서야 내가 잊은 것을 떠올렸어요. 포기하고 바람을 불어 꺼진 초를 끄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뒤 희영 씨는 내게 속삭였어요. 나 고구마 케이크 싫어하는데.”


희영은 탁상 달력을 마지막까지 넘긴 뒤 내년 12개월치 달력이 바늘구멍처럼 촘촘히 쓰인 면을 펼쳤다. 그리고 작은 글씨들 중 6월 14일을 찾아 동그라미를 그리고 여백으로 선을 하나 그려서 이어 붙였다. 거기에다가는 ‘폭죽 2개’라고 썼다. 그러고는 설명하듯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는 불발일 수 있으니까요.”

“희영 씨 폭죽 무서워하잖아요.”

“해가 바뀌면 나도 바뀌어 있을 테니까요.”

“초도 넉넉하게 준비해야겠어요.”

“그건 안 돼요.”


희영의 표정은 단호했고 나는 희영의 그런 표정을 보기 위해 몇 번 더 그녀가 싫어할만한 물건들을 골라 말했다. 하지만 나를 들뜨게 했던 희영의 반응은 곧 사라질 가을 저녁처럼 순식간에 저물어 갔다. 희영은 피곤해 보였다. 얇고 가늘어진 손목과 창백한 목덜미, 나사를 얇은 헝겊으로 덮어놓은 것 같은 쇄골의 도드라진 흔적까지.


나는 희영을 눕히고 나서 창가에 세워둔 작은 달력, 그러니까 한 해가 어처구니없이 한 장면에 모두 담긴 그 달력의 일부를 사진에 담았다. 사진 속에서 희영이 그린 동그라미와 폭죽 2개라는 글씨는 실수로 묻은 형광펜 얼룩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해 여름(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