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45)

45.

by 작가 전우형

45.


어깨너머에서 희영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탈길을 몇 번이나 오르내린 사람처럼 후들거리고 악에 받쳐 있었다.

그런데 오긴 할까요? 그날이.

밤안개가 몰고 온 습기 탓일까. 바깥이 흐릿해 보였다. 나는 뽀득뽀득 소리 나게 유리창을 문질렀다. 일부가 닦여나가고 일부는 그대로 남았다. 두 가지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해도 소용없는 말. 어느 쪽도 소용없게 느껴졌다. 나는 희영의 물음을 삼키기로 했다.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예약해 둘게요.

파인애플이 많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희영의 숨소리는 완전히 잦아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회전의자에 앉아 천천히 몸을 양옆으로 왔다 갔다 했다. 의자는 서서히 돌아갔다. 영수증을 꼭 받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업은 오후 다섯 시쯤 마무리되었다. 나는 짙은 고동색 방수 페인트 뚜껑을 덮고 붓에 남은 물기를 털어냈다. 희영은 차에서 몸을 웅크린 채 파란 기와지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가 출발했으므로 희영은 파란 지붕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머리를 어깨 쪽으로 붙이며 고개를 비틀어야만 했다. 나는 희영의 눈동자에 맺힌 수시로 색이 변하는 하늘과 뭉친 소금처럼 만질 때마다 끝이 바스러지는 파란 기와의 거칠거칠한 단면, 숱이 적은 머리카락 사이로 가끔 드러나는 하얗고 투명한 피부, 그리고 그 속에 잎맥처럼 뻗어나가는 핏줄기를 드문드문 곁눈질하며 엉성하게 놓인 통행금지 표지판 사이를 통과했다.

포장이 덜된 시골길은 마치 자갈을 그대로 쏟아부어 굳히기만 한 것 같았다. 차체의 덜컹거리는 울림을 그대로 들으며 나는 해가 내려앉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해의 윤곽은 크고 선명했다. 아마도 눈을 힘주어 닫지 않고도 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유일한 시간일 것이다. 하늘빛은 빨강에서 보라, 그 무지갯빛 스펙트럼의 어디쯤에 있었다. 고가도로의 실루엣 위로 자글자글한 돌기들이 빽빽하게 돋아 있었다. 일요일 저녁이었으므로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부지런히 돌아가는 중일 테다.

원래 있던 곳. 지는 해를 보며 많은 과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했겠지. 해도 졌으니 우리도 슬슬 집으로 돌아가볼까. 이제는 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고 먹고 잠들고 쉬고 일해야 하는 건 우리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한다. 존재하지도 않았을 태양의 원래 있던 곳을 가늠하며 피곤에 찌든 눈으로 그 끝을 그린다. 하고 싶었던 말을 충격으로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표정 없는 눈으로 먼 도로 끝을 응시하는 모습을 거울 너머로 확인한다.


나무 울타리를 새로 칠하고 싶어요.

희영은 묵은 응어리를 토하듯 그 말을 했다. 사진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시간으로 채워진 사진들을 한 장씩 뒤로 넘겨 손틈에 단단히 고정하며. 희영은 두 그루뿐인 감나무의 헐벗은 수관과 틈이 벌어진 낱개의 울타리들, 그 아래 허공을 사이에 두고 칼 모양으로 뻗어 나온 그림자, 기울어진 억새, 뜯어진 방충망, 낡은 벽을 촘촘하게 덮은 실금들을 손으로 짚어갔다.

이건 할머니 집에 처음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에요.


그때 희영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혜옥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성희는 성호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출발해 희영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혜옥의 전화를 받고 차를 돌려야만 했다. 성호가 가까운데 집을 구한 뒤 치매가 악화되던 혜옥을 간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혜옥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성호를 찾기 시작했다. 희영은 혜옥의 물음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우리 아빠 이제 없는데? 하고 대답했고, 혜옥은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달려와서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희영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재차 하늘로 쭉 뻗은 혜옥의 손을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성희가 다급히 붙들고 밀어내는 동안 희영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 기와지붕의 아랫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해가 전혀 들지 않는 그 아랫면은 아직은 화창하고 지나치게 밝은 하늘과 달리 어두컴컴한 흙빛이었다. 희영은 바닥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굴 전체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겹겹이 쌓인 비닐막 속에서 길고 긴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처음으로 할머니께 따귀를 맞았어요. 처음으로 할머니 집에 간 날. 그때도 울타리는 너무 오래돼서 상태가 엉망이었어요. 그리고 누워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도 엉망이라고. 너무 엉망이라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쳐야 할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저 울타리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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