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46)

46.

by 작가 전우형

46.


지극히 네가 보고 싶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 앞에 서서 생각한다. 지칠 대로 지친 말의 울음소리처럼 힘없는 시동음을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시동 버튼을 다시 누른다. 다녀오려고 했는데. 서늘한 한기가 감도는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나는 눈을 감았다. 턱을 들어 얼굴을 위로 향한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짙은 회색뿐. 콧속으로 차가운 아침 공기가 새어 들어온다. 나는 멈추지 않고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더 이상 가슴이 부풀 수 없을 때까지. 그러다 견딜 수 없이 후- 하고 숨을 불어낸다. 폐가 완전히 쪼그라들어 이제는 뱉어낼 수 있는 것이 무성의 발음뿐일 때까지 계속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채 버틴다. 마치 그것 외에는 세포 하나하나에 녹처럼 침투해 있는 쇠비린내 나는 물질들을 긁어낼 방법이 없는 심정으로 매우 신중하게, 세심하며 한편으로는 집요하리만치 가닥가닥에 스민 열기들을 걷어낸다. 어깨를 대충 손바닥으로 털고 차에서 내린다. 탕 하는 소리가 가까운 돌담에 부딪혀 내게로 메아리친다.


기억하기로, 잠든 건 새벽 두 시였을 것이다. 누운 뒤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던 터라 한참을 뒤척이다가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한 게 그 시각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희뿌연 빛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아직 덜 닦인 바닥의 먼지를 부분 부분 비추고 있었다. 잠을 설친 건 아마도 희영에게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관절마다 삐걱거리는 정제되지 못한 통증을 풀어내며 생각했다. 이런 차고 딱딱한 바닥 위에서라면 어떤 날이든 편히 잠들 수 없었을 거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모는 곧장 집을 이리로 옮겼어요. 고모부가 하던 사업이 잘 안 풀렸나 봐요. 목소리가 높아지는 날이 많아지더니 못 보던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지수만 치던 그랜드피아노에도 흉물스러운 스티커가 붙었고, 자연스레 지수가 피아노 앞에 앉는 일도 드물어졌어요. 곱게 차려입은 과외 선생님이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지수를 찾아오긴 했지만 피아노 연주는 중간에 자주 끊겼어요. 문틈 너머로 나지막하고 단호한 목소리도 들려오곤 했어요. 너 계속할 마음이 있긴 한 거니? 뭐 그런 잔소리 같았어요. 선생님이 오는 날 말고는 거의 피아노 방은 비어있었으니까요. 고모도 지수도 없는 날이면 저는 몰래 피아노를 쳤어요. 배운 적이 없으니 그냥 두드리는 거나 다름없었죠. 혹시 밖에 들릴까 조심스럽게 하얗고 까만 건반을 눌렀죠. 어딜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조금 막막했어요. 하지만 어떤 건반을 두드려도 같은 소리가 나진 않았어요. 한참을 긴장 속에서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소리를 듣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곤 했죠. 혹시나 들어올 때와 달라진 게 있나 꼼꼼히 살피고 방에서 나왔어요. 다른 건 최대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그날도 마찬가지로 저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왔어요. 할머니께 뺨을 맞고 하늘을 보던 입구를 지나 텅 비어보이는 문을 열었죠. 늘 닫혀 있던 피아노방 문이 미세하게 열려 거실 쪽으로 가느다란 빛그림자가 새어 나오는 게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적막한 분위기였어요. 저는 한쪽 벽에 짐이 잔뜩 쌓인 방에 가방을 대충 던지고 거실에 앉았어요. 시계를 보니 4시쯤이었어요. 고모는 7시는 돼야 오고 지수도 학원 두 군데쯤 마치면 5시 반은 넘어야 집에 왔거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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