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47)

47.

by 작가 전우형

47.


희영은 텔레비전을 켰다. 거실은 차가웠다. 희영은 벽에 기댔던 등을 앞으로 숙였다. 무릎을 세우고 감싸 안은 채로 텔레비전을 봤다. 텔레비전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뉴스 앵커의 반듯한 입모양을 희영은 따라 해 보았다.

앵무새는 모양을 흉내 내지 않는다지.

‘음량’이라고 쓰인 로터리 스위치는 오른쪽으로 더 돌아가지 않았다. 희영은 이를 악물며 한일자로 뻗어 나온 손잡이를 비틀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무슨 말이라도.

희영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킨 후 희영은 피아노방 앞에 다시 섰다.


**


희영이 문을 열었을 때 지수는 피아노 앞에 있었다. 지수가 물었다.

아까는 왜 아는 체 안 했어?

희영은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이 소금물에 절인 것처럼 끈끈했다.

미안. 눈이 아파서.

지수는 시종 악보를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희영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래됐을까?

뭐가?

이 피아노.

7년쯤?

아니. 혼자 있은지가.

지수는 손가락에 묻은 먼지를 매만졌다.

이 먼지들. 어디서부터 날아왔을까?

부스러기처럼 앉은 먼지들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언니는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부모님은 왜 날 낳았을까.

희영은 두 눈을 지수에게 고정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왜 떠나셨을까, 생각한 적은 있어.

지수의 머리가 불쑥 위로 치솟았다.

여기 보여?

지수가 가리킨 자리만 유독 먼지가 옅었다.

테이프가 붙었던 자리들이야. 압류라고 쓰인 빨간 테이프들이 목을 조르듯 붙어 있었어. 심지어 현(絃) 하나하나까지도.

지수의 시선이 차가운 금속빛의 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래서 연주할 수 없었어. 어떤 음(音)도 예전 같지 않았어. 조각나버린 우리 가족처럼. 엉망진창이었어.

무섭게 왜 그래 지수야.


**


지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어요. 눈동자가 녹아내렸고 지수의 머리 위로 송곳처럼 선이 솟아올랐어요. 지수의 목이 덜렁거렸고 축 늘어진 발끝이 건반을 건드려서 딩하고 소리가 났어요. 저는 불을 켰어요. 그리고 다시 껐고, 문을 닫았어요. 현관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고 고모가 뛰어들어왔어요. 피아노방 앞에 주저앉은 저를 보며 고모는 안색이 창백해졌어요. 어쩌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불안했어요. 고모의 비명이 들렸어요. 귀를 틀어막은 두 손을 뚫고.


지수한테서 문자를 받으셨대요. 그런데 달려오는 내내 차분했대요. 고모는 감각들에 전원이 끊어진 것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대요. 그러다 버스를 잘못 탔고, 내려야 할 정류장도 지나쳤대요. 고모는 식탁에 앉아 중얼거렸어요. 알아들을 수 없는 넋두리가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것처럼 시야를 하얗게 덮었어요. 그리곤 꿈을 꿨어요. 흘러내리던 눈동자가 누워있는 제게 한 방울씩 떨어졌어요. 그것들은 촛농처럼 딱딱하게 굳었어요. 저는 긁어서 그것들을 떼어냈어요. 떨어진 자리에서 피가 났어요. 피가 말라서 다시 점처럼 모양을 만들었어요. 한없이, 한없이 그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전신이 피로 끈적해졌고, 눈과 피부 사이가 붉은빛으로 가득 찼어요. 뜨거웠어요. 뜨겁고 답답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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