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48.
눈을 떴을 때 고모는 석상처럼 앉아 있었어요. 눈동자마저 굳은 채로. 저는 식탁에 엎드린 채 숨을 죽였어요. 그 답답함이, 온몸이 밀랍으로 뒤덮여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그 숨 막히는 느낌이 다시 몰려왔어요. 고모는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석조 미륵보살의 눈꺼풀이 열리듯 서서히, 고모는 그 무거운 눈동자를 제게로 돌렸을 뿐이에요. 잠시, 눈이 마주쳤던 것 같아요. 고모와, 아주 잠시. 그 잠깐의 접촉이 제게 알려주었어요. 남아있던 마지막 구속마저 떨어져 나갔다고.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다만... 이가 딱딱거리고 어깨가 떨려왔어요. 양팔을 움켜쥐어도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어요. 왜 다들 떠나는 걸까요. 왜 다들 나만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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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은 자신의 몸을 태우듯 축축한 열기를 내뿜으며 며칠을 잠들어 있었다. 몇 겹으로 덮은 이불속에서 희영은 오롯이 고통을 증발시키는데만 열중하는 것 같았다. 나는 희영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다가 갑작스러운 한기에 손을 오므렸다. 다문 입술 사이로 고집스러운 의지 같은 것이 간간이 새어 나오기는 했으나 희영의 얼굴은 눈 속에서 찾은 인형처럼 창백하고 투명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고 느낀 것은 미동도 없는 속눈썹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다음이었다. 마치 그 가느다란 흑선의 불규칙한 진동이 언어를 빚어내기라도 하듯, 나는 선명한 문장 하나를 느꼈다.
나는 희영이 덮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걷어냈다. 피에 젖은 붕대처럼, 환의는 희영의 몸을 완연히 구속하고 있었다. 얇고 성근 헝겊 너머로 비치는 은은한 살빛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짐승.
이번에야말로 나는 이 짧은 두 글자가 고막을 통해 흘러들어온다는 확실한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급히 돌리며 일어섰다. 희영은 힘겹게 상체를 세운뒤 흘러내린 이불을 당겨 몸을 대충 감쌌다.
나가 있을게요.
그냥 있어요. 돌아보지만 않으면 돼요.
올이 살갗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늘어지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밤의 스피커를 타고 귓가를 가득 채워 왔다.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채무이행을 독촉하는 전화처럼 머리를 기분 나쁘게 두드렸다. 창가로 새어 들어온 빛을 경계로 어둠과 더 짙은 어둠이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 완연한 ‘구분’을 통해 내가 있어야 할 곳을 가늠했다. 내가 그곳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을 때 희영의 멀어지지 않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같이 있어요. 멀어지지 말고, 그냥 여기에 머물러주세요.
등뒤에서 뭉클한 감각이 전해져 왔다. 바다가 갑자기 몰려온 것 같았다. 희영의 차고 부드러운 기운이 나를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나는 문득 고요해졌다. 두 개의 심장이 겹쳐 뛰었고 열기 하나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어둠보다 더 짙은 두 개의 그림자가 같은 방향으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얼른 마저 입어요.
얇고 고운 웃음소리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바다는 썰물처럼 멀어졌고 나는 어느새 쥐었던 주먹을 풀어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