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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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나가 복도를 살폈다. 밤의 병원은 고요했고 간호사실 쪽에만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희영에게 손짓했고 희영은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희영은 문을 조금 열어둔 채로 내게로 왔다. 희영과 나는 엎드려 잠든 간호사를 지나쳐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병동을 벗어났다.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고 뒤따르던 희영과 눈이 마주쳤다. 희영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나와 잡은 다른 손에서도 마찬가지로 힘이 느껴졌다. 나는 미리 보아둔 복도 가장 깊숙한 곳의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힘을 빼고 서서히 밀었음에도 어느 순간 찰칵, 하고 고정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닫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작은 소리 두 번이 나를 소름 돋게 했다. 모든 소리가 너무 거대하게 들리는 층계참에서 나는 멈춰 섰다. 희영에게 손가락을 펴서 입술 가운데를 가렸다. 우리는 벽으로 붙었다. 등에서부터 온몸으로 전류가 흐르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희영은 숨을 참고 위를 바라봤다. 희영과 나는 소리가 희미해지고 또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쳐들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자꾸 발을 헛디뎠다. 그때마다 희영이 나를 잡아주었다.
병원 1층 로비를 빠져나온 뒤 나는 택시를 잡으로 도롯가로 달려 나갔다. 불 꺼진 택시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뒤를 봤을 때 희영이 이미 꽤 멀어진 것을 발견했다. 희영은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나는 희영을 부르려다가 포기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걸어가기엔 먼 거리예요.
희영은 어깨를 잡는 내 손을 뿌리치고 계속 걸었다. 하릴없이 따라가는 동안 나는 밤이 꽤 따뜻해졌다는 걸 느꼈다. 유난히 하늘에 별이 없다는 것도. 희영은 가끔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늦췄다. 나는 두 걸음쯤 뒤에 멈춰 섰다. 희영은 다시 걸었고 나는 따라 걸었다. 옆보다는 뒤가 좋을 것 같았다. 잠깐 정도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새벽에 불이 켜진 곳은 가로등 아래와 편의점뿐이었다. 가로등이 만든 나무 그림자가 드문 드문 이어졌다. 나무 그림자들은 미로처럼 보였다. 희영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밝은 데만 골라 발을 디뎠다. 나는 편의점에서 온음료를 사 와 희영에게 건넸다. 희영은 두 손으로 살포시 유리병을 감싼 뒤 번갈아가며 녹였다.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다. 나는 [부재중 전화 7건]이라고 쓰인 화면을 잠시 쳐다보다가 진동을 꺼버렸다.
희영이 걸친 거라곤 면티에 얇은 카디건이 전부였다. 희영은 양손으로 팔 바깥쪽을 쓰다듬었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덮어주었지만 희영은 여전히 떨리는 몸을 악을 쓰듯 움켜쥘 뿐이었다.
감기 들겠어요. 택시 잡을 테니 기다려요.
그런데 왜 뒤에서 걸어요?
섭섭함을 넘어 분노나 원한이 묻은 것 같은 말투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희영은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옆으로 따라붙은 나는 희영을 힐끔거렸으나 가로등 빛이 머물 때 잠깐 보이는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희영의 눈은 이따금 가늘어지며 어딘가를 응시했다. 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유령처럼 들려왔다.
고모를 본 건 지수 장례식장이 마지막이었어요. 장례식장 위치를 몰라서 한참을 헤맸어요. 경찰이며 하얀 방역복장을 한 사람들이 발자국만 잔뜩 남겨두고 간 집에서 하루쯤 고모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밤이 되었고 저는 도망쳐 나왔어요. 걸었어요. 지금처럼. 공중전화 부스가 보이더라고요.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죠. 그리고 도로 내려놓았어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전화 같은 거,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언뜻 들었던 병원으로 무작정 찾아갔어요. 물어 물어 병원 안쪽 별도로 구분된 가장 구석진 건물 지하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앉아있는 고모를 봤죠. 고모부도 함께였어요. 저를 본 고모가 손짓했어요. 저는 고모 옆에 가서 앉았죠. 고모는 제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어요. 오로지 지금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고모는 제 손등을 매만졌어요. 보일 듯 말듯한 혈관을 따라, 굴곡진 마디와 골을 따라 차갑고 분명한 기운이 저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어요. 고모부는 못마땅한 눈으로 저를 봤어요. 고모부는 제 뒤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지만 저는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그만 집에 가서 쉬렴. 고모부는 그렇게 말했어요. 집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 저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고모는 일어서더니 제 손을 끌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저만 거기 세워두고 들어갔어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장례식장 입구에서 저는 한참을 서있었어요. 고모는 저를 다시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