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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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동그랗고 하얀 테이블이 보였어요. 저는 거기 앉아서 테이블에 엎드렸어요. 테이블은 차가웠지만 저는 버텨보기로 했어요. 버티다 보면 비슷해지겠지. 테이블이 따뜻해지든, 내가 차가워지든. 상관없잖아요, 그런 거? 그 사람이 죽은 거든 내가 죽인 거든 결과는 같은 것처럼. 다들 결론을 내려놓고 생각하잖아요. 한쪽 팔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에 몸서리치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눈물이 났어요. 기댄 팔이 끈적하고 미끄러워졌어요. 이마는 불덩이를 얹어둔 것 같았고 저도 모르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안 내려고 한참을 참았는데. 왜 울었냐고요? 아뇨. 전 울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없었어. 젠장. 아무도. 당신처럼 왜 우는지 묻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고요. 새벽이라 그런 걸 거야. 모두 잠들었을 시간이니까. 여긴 울음 따위 너무나 흔한 곳이니까. 모두가 우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곳이니까. 나는 그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데. 나는 울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온 건데. 그때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희영은 걸음을 멈추었고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희영의 눈빛은 가늘고 깊은 자국처럼 나를 파고들었다. 압축되고 과열되며 날카로워지듯이 나는 짜릿함을 느끼며 묵묵히 그 눈빛을 받아내고만 있었다. 과연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느냐고 묻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말했다.
"선물 받는 거예요. 우리의 시간은 모두 우릴 만들어주신 그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거라고요. 희영 씨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몸은 기억할 거예요. 그 속에 머물던 시간들을. 같은 피가 돌던 핏줄과 탯줄의 시간들을. 엄마는 아이에게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준대요. 1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엄마는 앞으로 평생을 살아갈 아이의 시간을 차곡차곡 담는대요. 엄마의 시간은 그 속에 있어요. 그게 우리가 엄마의 품을 떠나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예요. 희영 씨처럼요. 그래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도시락통 같은 곳에 담아둔대요.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순간을 기대하는 거예요. 꼭꼭 모아서 싸 두었다가 선물하고 싶은 거예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부족함이 없도록,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바꿀 수 없는 걸 모아두는 거라고요. 희영 씨 어머니도 분명 그랬을 거예요. 희영 씨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온몸으로 당신을 듣고 만지고 감각하며 완벽하지만 일시적인 분리의 순간을 꿈꿨을 거예요. 아직 눈으로만 보지 못했던, 나와 같지만 나와 완전히 다른 한 인격체를."
희영은 내 눈을 쳐다보았다. 나는 내 마음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 희영이 도망쳐버릴까 봐 겁났다. 희영이 말했다.
"배고파요."
희영이 손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밤거리를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는 24시 국밥집 간판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의외로 안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희영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다가와 물병과 컵을 놓으며 말했다.
"지금은 콩나물 국밥만 됩니다."
희영은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걸로 두 개 주세요, 하고 말했다. 직원은 돌아서며 무심히 희영을 스쳐 보았다. 나는 컵에 물을 따랐다. 테이블 옆의 서랍을 열고 수저를 두벌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콩나물 국밥은 금세 나왔다. 기성품처럼 보이는 진한 갈색 뚝배기는 언뜻 플라스틱 재질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풀어 오르는 연기 사이로 희영이 숟가락으로 잔뜩 쌓인 콩나물을 누르며 국물을 재는 것이 보였다. 희영은 천천히 후후 불며 뜨거운 국물을 삼켰다. 내가 보고만 있자 희영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가 턱짓으로 뚝배기를 가리켰다. 나도 국물을 한술 떠 넣었다. 그리고 뜨겁게 차오르는 김을 입술 틈으로 뱉었다. 이내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한쪽 벽면에서 두런두런 그다지 새롭지 않은 소식 따위를 전하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이따금씩 달그락거리는 쇠 부딪는 소리와 호로록거리는 소리들 사이로 들릴 뿐이었다.
희영은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그녀는 내가 몇 숟갈 뜨는 모양새롤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대신 먹어줄까요? 하고 물어왔다. 국자를 가져오려는 나를 손짓으로 멈춰 세우며 희영은 내 앞에 있던 뚝배기를 망설임 없이 끌어갔다. 그녀가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이는 걸 보며 나는 빈 접시에 깍두기를 새로 담아왔다. 배를 두드리는 희영을 보고 있는데 바깥의 색이 묘하게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밤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그 위를 아직은 매우 짙어서 구분하기 힘든 군청색 무리가 채워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물었다.
"계속 갈 거예요?"
희영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배를 채운걸요?"
희영은 의자에 걸어두었던 얇은 밤색 카디건을 한쪽 어깨에 걸치며 일어섰다. 희영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만 원권 지폐 몇 장을 꺼내 계산하는 동안 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등을 바라봤다. 계곡 물이 흐르는듯한 곡선이 곧게 뻗은 얇은 옷가지 위로 꽤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먼저 나서는 희영을 따라가며 나는 물었다.
"돈은 언제 챙겨 온 거예요?"
"대책도 없이 병원을 뛰쳐나왔을까 봐서요?"
희영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고 조용하던 도로 위로 차들이 하나씩 쏘다니기 시작했다. 골목 저쪽에서 밝은 빛무리가 빠르게 가까워졌고 나는 희영의 손을 잡아당겼다. 작은 택배 트럭이었다. 우리는 골목으로 들어섰고 비슷한 모양의 택배 트럭 2대가 더 지나가는 것을 피해 가쪽으로 붙어 걸었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소매로 가리며 희영은 콜록거렸다. 나는 희영의 기침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손을 내저으며 뿌연 공기를 맥없이 밀어내다가 우리는 왕릉교 앞에 다다랐다. 등을 환하게 밝힌 왕릉교 아래로 제민천이 얕게 흐르고 있었다. 벌써 그 길을 산책하듯 걷는 인영도 몇몇 보였다. 그들의 그림자는 잔잔한 물살 위로 구슬처럼 박힌 등불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우리도 내려가봐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미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 희영을 따라 나도 발걸음을 돌렸다. 나무 계단은 탁탁탁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새벽을 타고 흐르는 가냘픈 물소리와 합쳐지며 타악기 합주처럼 주변에 두런거렸다. 작은 송사리 떼가 왕릉교 그림자 아래에서 또 다른 그림자처럼 무리 지어 있었다. 희영이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며 그 옅고 넓게 퍼진 그림자들 사이에 구멍을 냈다. 이내 그 구멍은 같은 색으로 다시 채워졌고 희영은 너른 계단처럼 심어둔 바위단에 앉아 재차 돌을 주워 들며 그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