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소설입니다

by 작가 전우형

나는 한쪽 구석으로 밀어둔, 이제는 단종된 휴대전화를 열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손님이 머물 때면 배경처럼 틀었던 10시간 분량의 찬송가 모음이 속삭이듯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서서히 볼륨을 높였다. 여느 때였다면 침묵을 지키려 노력했겠지만 오늘은 그 빈 공간이 서리 가득한 새벽 공기처럼 유난히 차고 시렸다.


밖은 영하 17도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뻥 뚫린 하늘도, 그 속을 유성 줄기처럼 내리쬐는 햇살도, 거울에 비친 듯 선연한 냉기를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 차가운 공기 덩어리는 유리와 콘크리트 벽면을 유유히 통과해 실내를 냉동고로 바꿔 놓았다. 나는 담배 연기처럼 뽀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비명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제야 대충 걸치기만 했던 외투를 턱밑까지 조여 단추를 채우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양팔을 교차해 어깨를 감싼 뒤 무릎을 접어 구부린 몸에 포개어 넣은 다음 소매를 당겨 손등을 덮었다. 그러자 겨우 한기로부터 몇 걸음 물러선 기분이 들었다. 온기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는 정신이 둥글게 말리는 걸 느꼈다. 거북이처럼 딱딱하고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곳으로 숨을 준비를 했다.


나는 늘 도망치는데 진심이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길 망설였고, 한기와 열기, 독립과 의존, 소외와 합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침묵이 석연찮을 때는 없었는데. 거기서 만큼은 입장이 분명하다고 믿었는데. 온전히 적막이 나를 둘러싸길 간절히 바라 왔는데. 오늘은 그 고요가 유난히 버겁고 조금은 무섭게 다가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살갗을 따끔거리게 하고, 소리의 가장자리가 아리도록 날을 세운 채 주위를 맴도는 걸 느낄 때, 나는 그 말없는 하루의 속삭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이 고요를 통해 내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걸까. 문득 해석할 수 없는 외로움이 밀어닥치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는 호흡을 송곳처럼 가늘고 뾰족하게 다듬는다. 그리고 천천히 밀어내고 또 끌어당기며 한 손으로는 명치 언저리를 쓸어내린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미친 사람처럼 소매째 말아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참을 수 없이 두드린다.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하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 그곳을 북을 치듯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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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아래로 치달은 기온을 증명이라도 하듯, 보일러부터 얼어붙었다. 온수 쪽으로 레버를 돌리면 물줄기는 마법처럼 잦아들었다. 물은 아직 얼지 않은 게 경이로울 정도로 지독한 냉기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며 요 며칠 특히 자주 주고받았던 '새해 복'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설 바로 다음 날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눈처럼 하얀 피부에 빛바랜 금색 머리의 모녀가 내게 했던 '쌔해 뽁 마니 바드쎄요.'라는 인사도 떠올랐다. 몸인지 마음인지 모를 깊숙한 곳까지 선득한 한기가 미칠 때마다 그들의 미소 가득한 얼굴이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그리고 울린 첫 전화. 그것은 카드사 독촉 전화였다. 자주 들어 익숙해진 녹음된 목소리 대신 지나치게 정중한 상담원의 음성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나는 상담원이 최종 선고하듯 읊어주는 내용을 들으며 그렇구나,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뒤이어 새해 편지처럼 날아든 문자를 확인했다. 십육만삼백구십칠 원. 그렇구나. 나는 그 여섯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선고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겨우 이만한 금액 때문에. 허탈함을 넘어 저 깊은 곳에서 나를 지탱하던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을 저울질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고가인 노트북을 펼치며 이 녀석을 처분하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상하게 시작한 하루는 고장 난 자판기처럼 주문하지도 않은 일들을 잘도 만들어냈다. 나는 노트북을 열 번 정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연거푸 누른 뒤에야 노트북이 켜지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받아들였다. 노트북이 방전된 것은 사소한 일이었다. 충전기를 집에 두고 온 것도 매우 사소한 문제였다. 나는 잠시 서성이다 수첩을 펼쳤다. 그러나 겨우 4줄을 쓰는 동안 열일곱 번이나 하얀 자국을 남긴 만년필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고, 오기만 남은 나는 꾹꾹 눌러 획을 몇 번 더 긋다가 결국 만년필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가쁜 숨을 내쉰 끝에 만년필을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았지만 한번 치솟은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나 덕분이랄까. 나는 맨 위까지 채워둔 외투 자락을 뜯어내듯 풀어헤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