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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01. 2023

결혼기념일

에세이

  2주 전, 그러니까 1월 셋째 주, 저는 FM(Fisher of Man) 캠프 예배팀으로 4박 4일간의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FM 캠프는 어부 연합(어부들의 교회)에서 연 2회 개최하는 청소년 수련회의 정식 명칭이며 팬데믹 등을 고려하여 약 2년간 중단하였다가 작년 여름부터 재개되었습니다. 저는 캠프 참가가 처음이었기에 모든 게 새롭고 낯설었습니다. 맡은 임무는 찬양팀 싱어. 팽성의 작은 시골 교회에서 마커스 찬양에 맞춰 마이크 몇 번 잡은 게 전부인 제게는 너무나 과분한 일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었는지 덜컥 지인의 제안에 승낙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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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교회에 첫발을 들인 건 2013년 여름이었습니다. 그해는 '돌고래'라고 불리는 소형 잠수함(현재는 모두 퇴역한 함형입니다.) 부장(부함장)으로 보직하던 해였습니다. 해상훈련 중 협소한 함 내부가 연기로 가득 차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긴급 부상해 상황 파악을 마쳤을 때 승조원 모두는 말을 잃었습니다. 잠망경 항해 중 추진 모터가 전소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돌고래'는 재래식 잠수함이었습니다. 재래식 잠수함은 흔히 핵 추진 잠수함과 구분되는 잠수함 형태로, 디젤 발전기로 충전한 전력을 이용해 추진 모터로 항해하는 잠수함을 말합니다. 즉, 추진 모터가 손상되었다는 말은 잠수함의 항해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통신 장비를 복구해 상부에 보고를 마친 뒤 저는 함장님과 함께 너울 치는 함교 위에서 말없이 북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함장님은 원래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입을 꿰맨 사람처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선이 우리를 구해줄 때까지 속절없이 바다 위를 유영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지휘관에게 부대의 운명을 타인의 손길이나 '운'에 맡겨야 하는 순간만큼 치욕적이고 현실을 부정하고픈 순간도 없을 겁니다. 그날 우여곡절 끝에 모선 입거를 마친 뒤에도 함장님은 한동안 침묵을 깨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날 모선 사관실에서 떴던 미역국 첫술을 잊지 못합니다. 마른 입술을 적신 뒤 타들어가듯 식도를 따라 흐르는 열기는 모처럼 느껴본 생생한 감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제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분명한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항해에서 복귀한 뒤 지난한 사후처리가 이어졌습니다.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겨울이 봄이 되고 복장이 여럿 바뀌었습니다. 몇 차례 조심스러운 권면에도 외면했던 교회를 사담으로는 처음 저에게 건네었던 "힘들면 같이 가자."는 함장님 말씀에 거부감 없이 따라나섰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겁니다. 그냥, 거기가 어디든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첫발은 내디뎠지만 '교회'라는 곳에 정이 붙은 건 아니었습니다. 군 교회의 특수성 때문이었을 겁니다. 애써 찾은 교회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부대 내에서 늘 보던 '군인'이라는 특수성. 군인에게 상수처럼 자리 잡은 수직적인 관계가 그곳에서도 여지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곳이 겉모습만 다른 군대처럼 답답하게 여겨졌습니다. 교회라는 '공간'을 벗어나면 제2의 인격이 나타나는 분들 또한 신앙의 거대한 장애물이었습니다. '장로'나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가진 분들에게 '교회'(정확히는 '예배당')라는 물리적 공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이 저를 난감하게 했습니다. 신앙에 공간적인 제약이 그토록 분명하다면... 그렇게 육 개월 뒤 저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제가 다시 교회를 찾은 것은 2년 후 맞이한 늦봄으로 기억합니다. 모진 상관을 만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가던 때, 저는 계절의 변화를 잊었고, 말수가 줄고, 자주 멍해졌습니다. 정신을 잃고 실려간 병원에서 이상한 말을 듣습니다. 이젠 헛것마저 들리는구나, 하고 부대로 복귀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어려웠습니다. 또 눈을 떴을 때는 하얀 벽.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제 죽어야겠구나. 진짜 그래야겠구나.

  우울증이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손에 쥐어준 소견서에 쓰인 정식 명칭은 '중등도 우울장애'. 뒤에 신드롬이라는 말이 붙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지만 앞의 두 단어는 여전히 선명합니다. 병가를 받고 상담실과 정신건강의학과를 들락날락하며 먹으면 어깨가 가벼워지고 잠자리는 엉망이 되는 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교회의 문턱을 다시 넘은 것도 그즈음이었을 겁니다. 꽤 울었던 것 같은데, 그 일로 한동안 예배를 나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너무 부끄러웠거든요. 그 후로 드문드문 예배에 참가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 세례도 받고 아이들도 유아세례를 받고, 저는 '전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인정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소령 계급이었고, 군 교회는 계급에 적당한 직분을 의례적으로 주었기에 그렇게 된 것뿐이었습니다.  

  신앙에 의지해도 우울증은 저를 놓아주지 않았고 부서 이동과 휴직, 복직을 거듭하며 대략 오 년을 버틴 뒤 저는 최종적으로 전역하게 됩니다. 전역하던 해(2020년입니다.) 저는 평택에 있었습니다. 그때도 얼치기 집사로 드문드문 신앙생활을 하던 터라 목사님께서 제가 딱하셨는지 한주에 한 번씩 만나 7주간 성경공부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면하셨습니다. 전직지원기간이 10개월 주어졌던 터라 놀고먹던 저는 뭐 그럴까요? 하고 매주 목요일마다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말이 성경 공부지 사실 그 자리는 목사님께 제가 목도해 왔던 온갖 행태들과 더불어 해묵은 원한 같은 질문들을 성토하는 자리와 같았습니다. 원죄라는 건 기독교에서 십자가의 부활에 구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프레임은 아니냐, 태어나서 아직 해본 일이라고는 엄마 젖밖에 물어보지 못한 아이가 무슨 죄를 타고났다는 거냐,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는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알기는 하느냐, 그 사람들이 무슨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그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 죄를 더하는 걸로 보인다. 심지어 나를 궁지에 몰아 우울증을 앓게 한 사람도 독실한 천주교인이다. 방향만 조금 다르지 그 사람이 믿는 성모 마리아나, 개신교에서 믿는 예수님이나 도찐개찐 아니냐... 적나라하고 무례한 질문들을 쏟아붓던 시간 동안 묵묵히 제 얘길 들어주던 목사님과의 7주가 끝났을 때 제게 남은 건 후련함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남 욕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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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주의 성경 공부를 마치고 그다음 주, 저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카페 사장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목회자였습니다. 카페를 맡아 운영하며 커피를 배우고 인연을 거듭하다 정착하게 된 교회가 앞서 말한 팽성의 조그만 시골 교회(이름도 흔한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작은 교회인데 희한하게도 그 안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수백 킬로미터 먼 타지에서 고향의 언어가 숨 쉬는 곳이라 더 정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사람이 싫어 교회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이번에는 그런 장애물마저도 없는 신앙 공동체를 만나고, 직전에는 마치 물로 세례 받듯 그간의 허물을 깨끗이 씻어낸 터라 자연히 신앙생활에도 탄력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FM 캠프 참여 제의는 그런 중에 제게 찾아온 부르심이었습니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하나님을 만난 저에게 청소년 수련회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집사람도 걱정이 앞섰는지 제 안색이 통 별로라며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캠프 전주부터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고 찬양도 좋지만 무대에 선 적도, 캠프 경험도 일천한 사람이 갑자기 덜컥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지, 가뜩이나 우울증을 겪으며 대인 기피도 있던 저였기에 걱정도 많았습니다. 출발하던 주일 저녁, 저는 몸살에 걸려 있었습니다. 인원이 충분하다면 조용히 빠질까 고민도 컸습니다. 결국 따라나선 건 번복하겠다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한 제 소심한 성격 탓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듣는 사람이야 어땠든 저는 캠프 내내 즐거워서 힘든 줄 몰랐습니다. 신앙이 두텁지 못한 저는 기도도 어렵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순간도 '찬양'이라는 제한된 시간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캠프의 뜨거운 열기와 예배의 은혜에 서서히 녹아들면서 찬양의 기어가 서서히 높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늘 저를 옥죄어왔던 고민, 두려움, 근심, 걱정들로부터 해방되었고 눈앞의 아이들을 위한 기도와 찬양이 터져 나오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일이다'라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가진 본래의 의미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아멘'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런 일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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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에게는 이번 캠프가 '하나'님과의 두 번째 신혼처럼 느껴집니다. 신혼처럼 배우자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시기가 또 있을까요? 캠프 내내 찬양을 듣고 부르고 연습하며 저는 늘 하나님 곁에 머무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이름이 '하나'입니다.(처남 이름은 '두리'. 이름 참 쉽게 지으셨다고 장모님께는 속으로만 전했습니다.) 저는 우스갯소리로 집에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고 말하곤 합니다. 아내는 기독교가 모태신앙입니다. 주일이면 습관처럼 교회로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게 일상이었고, '미션 스쿨'에서 수학하며 학교에서도 예배로 시작해 예배로 끝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저는 아내에게서 교회의 '교'자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함께 교회를 나간 일도 없습니다. 제게 교회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부장으로 일하던 배의 함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물었을 때 아내는 어쩌다 보니,라는 말로 답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나가던 사람도 '어쩌다 보니' 하나님을 스스로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 마음 아프게 들렸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신앙을 되찾아가는 느낌입니다.

  FM 캠프 바로 다음 날은 제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것이 2008년이니 벌써 15년을 채운 셈입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시간, 옆에 머물러줘서 고마워'라고 썼더니 다들 낭만적으로 보인 모양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30년도 넘게 산 것 같은데 돌아보니 아직 15년밖에 안되었더라. 세상에 그 긴 시간을, 아직도 나 같은 사람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켜줬구나. 그런 탄식과 경외를 담은 감사의 말이었던 거죠. 더불어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사건이 여전히 '기념'할만한 일로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결혼이란 원망과 후회의 대상이거나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선택을 달리하고픈 결정적 순간일지도 모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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