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김

에세이

by 작가 전우형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다는 말, 자주 쓰곤(듣곤) 했습니다. 저는 천국도 지옥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팸플릿이라도 본 걸까요?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이 두 장소는. 특히 그중에서도 후자가 더욱 제 마음속에 자주 오르내렸던 것 같아요. 죽은 후에 제가 갈 곳은 분명 지옥일 거라고 나름의 결론을 내린 건(물론 이런 일에 저의 의중이 반영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울이 제가 밟고 있는 시간을 날카롭게 겨눈다는 것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질 때였습니다. 저는 방아쇠를 손가락에 건 기분이었어요. 당기는 건 나, 부추기는 건 우울. 상하 관계라기보다는 협력 관계라고나 할까요. 우울은 실질적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고, 나는 되도록 빠른 시점에 떠나기 위해 우울이 '필요'했으니까. 떠나는 게 목적이었어요. 어디로든 떠나면 될 뿐,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개 그런 사람이 도착하는 곳은 정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울이 은근한 방식으로 저를 부추길 때, 저는 아주 건전한 방식으로 자해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의 자해라고나 할까. 방만한 자기 관리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아요. 끼니를 자주 거르고, 잠을 기피하고, 몸을 혹사시키죠. 그리고 자주 어딘가를 다칩니다. 거기 왜 그래? 응, 뭐가? 거기 말이야, 거기. 어, 그러네. 언제 그랬지? 같은 식이죠. 차분히 소멸을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죽음을 서두릅니다. 대체로 무력한 상태는 아닐 겁니다. 적극적으로 일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소진시킵니다. 연필을 빨리 쓰기 위해 아무 그림이나 그리고 여백을 빈틈없이 칠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아요. 뭉툭해진 심을 자주 깎을수록 남은 길이는 더 적극적으로 줄어들 테니까요.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을 서두르는듯한 인상을 주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생(生)에 대한 진지한 의욕이 결여된 상태라는 것도 가급적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걱정은 부담스럽거든요. 무엇보다도 주변의 관심은 거추장스럽습니다. 보다 열심히 사는 것, 정도로 비치길 원하죠. 이 단순하고도 강력한 방식의 증속에 제동이 걸리길 원치 않거든요.


우울이 이전보다 직설적으로 나 여기 있어, 하고 말을 걸어올 때가 있습니다. '대놓고' 까지는 아닌데, 이제 내가 옆에 있다는 걸 네가 알아도 상관없어,라는 식이 되면, 마음이 꽤 단순해집니다. 일단 사는 게 거추장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제가 이 느낌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순간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생각이 자주 들 때입니다. 내일이 반드시 올 거라는데 조금 회의적이 되는 거죠. 오늘 저녁엔 뭘 먹지? 내일은 어디 가지? 우리 다음 달엔 뭘 할까? 내년 여름에는 차라리 온천으로 갈까? 와 같은 계획과 질문이 사라지거나, 빈도가 급감합니다. 누가 그런 질문을 하면 '나는 어떻든 좋아. 상관없어. 그냥 네가 정한 대로 할게.'라는 답을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틈틈이 그런 날이 올까?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되뇌기도 합니다. 뭔가 열심히 계획을 짜고 다음을 구상하는 일에 냉소적이 됩니다.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다, 정도로는 이 느낌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보다는 미래가 '없다'라고 느낀다는 게 적확한 표현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현실적인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항변할지도 모르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일'이란 분명 현재의 시점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내일이, 더 넓게는 우리에게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쩌면 희망론에만 근거한 막연한 판단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확신은 오늘이 절망적이지 않기 위한 주문에 가깝습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필사적으로 만든달까. 실은 당장 도로에 진입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쪽이 미래에 대한 더 확률 높은 비전(vision) 일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런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살다가는 오늘 우울을 장전한 방아쇠를 당기고 말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무채색으로 뒤덮인 시간을 걷어내려는 시도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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