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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16. 2023

신앙의 점검

에세이

  제가 신앙을 점검할 때 확인하는 몇 가지 항목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입니다. 감사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정도로 저는 감사를 신앙의 요소 중 첫 손에 꼽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문득 내 안에 감사가 모두 메말라 있었다는 걸 체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종일 불만에 찌들어 지냅니다. 사람을 보면 미운점부터 보이고, 작은 문제에도 짜증이 치솟습니다. 일은 귀찮고, 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기 힘듭니다. 석연치 않았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순간들이 눈앞을 빙빙 돌며 저를 약 올립니다.      


  저는 매 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길 소망하지만 그것은 일단 ‘제게는’ 불가능합니다. 일시적으로 그런 ‘상태’가 되어본 적은 있지만(기도회나 부흥회 때 경험하는 상태와 유사할 테지요.) 그런 상태가 무한히 지속된 적은 없습니다. 그건 일종의 ‘기쁨 홀릭(holic)’입니다. 모든 상황이 호의로 가득 차고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세상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대비나 계획, 예측 없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저는 적절한 부정 정서 또한 중요하게 여깁니다. 스스로를 차분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슬픔, 두려움, 우울과 같은 정서들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이런 정서들은 적절한 긴장을 유도하고 감각을 일깨워서 주변을 살피고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저를 돕습니다. 현실적인 사고를 통해 객관화하여 나와 타인, 상황,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지요. 이것은 ‘적절한’ 부정 정서의 중요한 역할입니다.(지나친 부정 정서의 역할은 아니고요.) 


  다만, 제가 경각심을 갖는 것은 내가 하루 또는 일주일, 혹은 그 이상 기쁘거나 감사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뒤늦게’ 느끼는 경우입니다.(실제로 제게는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고, 어떤 때는 제가 그런 상태였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느낌이 들 때 저는 신앙을 차분하게 되짚어봅니다. 왜냐하면 제게 신앙이 여전히 건재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두 번째는 ‘더 예뻐지는 삶’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스스로 그런 삶을 이루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함께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렇게 만드는 것. 


  제가 기도 중에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더 예뻐지길’이라는 말입니다. 예쁘다는 말, 사회에서는 외모를 평가하는 단어로 사용되지만 저는 다른 의미로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웨슬리는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은 성경 말씀을 꾸준히 실천하는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신앙의 길을 걷는 분들이라면 어제보다 오늘이 더 예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담아가는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스며든 빛은 삶의 태도, 가치관, 언행, 말씨와 마음씀씀이 등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실천의 형태로 삶에 반영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런 느낌이 일정기간 반복되거나 지속된다고 판단될 때, 저는 신앙을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다른 지표로서, 저는 ‘함께하는’ 이들의 모습을 봅니다. 타인의 인상은 그 사람의 객관적인 실체,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이의 주관적 시선, 이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누군가가 예뻐 보일 때 두 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가 실제로 예쁠 때, 두 번째,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을 닮아갈 때. 이중 그의 실제 모습은 철저히 타인의 영역으로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기도를 통해 벌충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롯이 저의 영역이고, 신앙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려운 것도 많고 할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머뭇거릴 때도 많고 힘써 나아가야 할 순간에 주저앉거나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데도 적극적이지 못하죠. 이런 저를 두고 A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결정장애가 심해서 큰일은 못할 사람이야. 생각도 없고 결단력도 없어. 그렇게 자기주장이 없으면 늘 끌려다니고 피곤하기만 할걸?” 하지만 B는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너랑 있으면 싸울 일이 없어서 좋아. 내 말을 침착하게 들어줘서 고마워. 넌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함부로 강요하거나 지적하지 않아서 좋아.” A와 B 중 하나님의 시선을 닮은 쪽이 누군지는 명확합니다. 저도 모르게 A처럼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평소에 예쁘던 사람도 밉고 못나 보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을 배우고자 노력한다면 그 약간의 차이만큼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인상 또한 매일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타인을 변화시키는 일은 어렵지만 타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교정하는 일은 쉽습니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테지요.      


  누구에게나 결점은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모두 다릅니다. 자신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평생을 모르고 살기도 합니다.(저도 제 달란트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달란트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발견하지 못해서(라고 믿고 있습니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 이상 애초부터 달란트가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전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저는 그게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합니다. 달란트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그 달란트가 발현될 만큼 성장하지 못했거나. 제가 타인을 볼 때 염두에 두는 두 가지는 사랑과 기다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볼 때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그 사람의 달란트를 ‘발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선으로 저는 저를 아직 포기하지 않고 버틸 힘을 얻습니다. 성경은 경전이고 오래된 문서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약속'이니까요. 오랜 약속, 그리고 새로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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