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전우형 Feb 20. 2023

겸손과 성실

신앙 에세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알려주시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새겨듣는 메시지는 '겸손'입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늘 경계하시고 자처하여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자기 PR에 힘쓰고 높은 곳을 지향하라는 세상의 성공 방정식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늘 제게 해주십니다. 제가 교만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취약함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니까요.


  저는 겸손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성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뇌피셜입니다만) 구원에 이르는 길은 꽤 먼 것 같습니다. 평생을 부지런히 걸어야 간신히 당도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곳에 있다고 내부적으로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누군가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주장하지도 않지만요.) 구원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구원이란 뭘까. 정말 그런 게 있긴 한 걸까. 있다면 어떤 상태일까. 내가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걸 스스로 알아차릴 수는 있을까? 그런데 제 급한 성격으로는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과 신앙의 시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겸손은 그렇게 제 안에 모토로 자리 잡았습니다.


  내세우지 않는 일은 하나의 중요한 과정을 요구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명제를 수용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이 명제를 수용하고 나면, 나를 내세우지 않는 건 너무나 쉬운 일로 변합니다. 내가 해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결론은 하나밖에 남지 않습니다. 높일 분은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 겸손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저는 종종(아니, 여전히 꽤 자주) 실수를 합니다. 그건 무언가를 해내는 과정 때문입니다. 몰입하고 노력하는 과정은 에너지를 온전히 한쪽에 치우치도록 합니다. '전념'하지 않고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은 드물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든 크든) 뭔가를 이루어내고 나면 대단한 기쁨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 기쁨이란 때때로 가장 중요한 명제를 누락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겸손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성실'을 선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구원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갑자기 덜컥 문이 열리고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 믿고요. 저는 성실함이 켜켜이 쌓여 신실함을 일궈낸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삶의 '밀도'에 대한 고민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삶의 밀도는 달라집니다. 무작정 많은 일을 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실은 오히려 적절한 '휴식'을 보장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다만 신앙적 의미에서 성실함이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생각, 행동, 이념, 유혹들에 우리의 소중한 삶을 '허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을 성경적 방식으로 충실히, 그러니까 지극히 '성실'한 방식으로 쌓아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겸손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면 쉽고 간단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계가 자연스럽게 세워집니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들이 주장하는 흔하고 강력한 프레임에 대한 직관을 갖출 수 있습니다.(제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저는 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로또에 흔들립니다.) 그 프레임의 골자는 기회, 대박, 저비용 고효율 같은 것들이죠. 즉, 대단한 무언가를(대개 돈이죠) 쉽고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데 이번이 바로 그 기회라는 겁니다. 통상적으로 '역대급'이나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붙는 것 같습니다. 홈쇼핑처럼요. 결재버튼은 누르기 쉽고 취소버튼은 찾기 어렵습니다. 결제금액을 갚아나가는 일은 더 어렵고 고단합니다. 새로운 것을 가졌다는 열락도 잠시, 매우 긴 시간 동안 '등신값'을 치러야 합니다.


  예컨대 쉽고 간단하게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일이란 60개월 할부로 자동차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 홍보의 중요한 전략은 당장 치러야 할 대가를 가급적 작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채무 덩어리 전체를 감추고 작은 귀퉁이만 내밀어두는 것이지요. 일단 이것만 하면 돼,라고 속삭입니다. 세상의 것이라면 나름 합리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할부가 종료될 때쯤 찻값은 절반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동안 유용하게 사용한 것으로 그만한 대가는 회수했다고 여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긴 덩어리를 놓고 본다면 결과는 조금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건 그런 유혹들이 우리를 채무자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채권자는 '세상의 그 무엇'이 됩니다. 당장 세상의 채무들에 시달리느라 하나님께 작은 성의 표시를 하는 것조차 버거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자체가 신앙인의 삶에서 '성실'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흐름으로 작용할 테니까요.


  저는 겸손을 지극히 성실한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태도란 섣불리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이루어짐을 경계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기다림'이라는 무거운 시간을 버티기 위한 강건한 체력이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가 불리 절망하고 작은 성취에 교만하기 쉬운 저를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긴 줄의 끝에 제가 추구하는 신앙의 가치나 목적이 걸려있다면, 그것을 힘주어 아주 잠깐, 조금 잡아당긴다고 해서 갑자기 쭈욱 달려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꾸준히 오랜 시간에 걸쳐 성실하게 잡아당길 때 서서히 제 앞에 드러나겠지요. 저는 신앙인이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방식 또한 이와 같다고(혹은 같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약속과 말씀으로 이루어진 성경에서 추구하는(혹은 허락한) 방식이라는 것도요.


  

작가의 이전글 신앙의 점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