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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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날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느라 깊이 의문을 품을 겨를이 없었어요. 제가 그때를 다시 떠올린 건 지수의 장례식장 밖에 서 있을 때였어요. 지수를 이해하고 싶었거든요.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는 사람은 많지만 그걸 실행하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지수는 그럴만한 아이가 아니었어요. 자주 우울해하고 비관적인 자신의 상황을 마치 자랑하듯 장황하게 떠들어대긴 했지만 그건 지수만 한 나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작은 오르골 같은 거잖아요? 감아서 조금 듣다가, 또 감아서 조금 듣다가. 그저 멜로디로서 소리 없는 현재를 위안 삼는 아주 사소한 장치 같은 거. 인간이 그런 장치들을 소유하고 또 거기에 빠져드는 건 약하기 때문 아니겠어요? 도망치는 거죠. 분명히. 지수는 그런 아이였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지수가 피아노방에서 목을 매었던 날, 안타까움보다는 분노를 먼저 느꼈어요. 누가 무서운 장면을 더 오래 견디나 내기하다가 진 것 같은. 절대 나보다 먼저 눈을 감고 뒤로 돌아보고는 엉엉 울며 매달릴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보다 내가 먼저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섰을 때의 느낌. 그 비참함, 좌절, 수치심. 그런 것들이 도저히 억눌러지지 않았어요. 우린 죽음에 무지하면서도 서로의 죽음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한 적이 많았거든요. 나는 어떻게 죽을 거야. 나는 언제 죽을 거야. 나는 어떤 사람처럼은 절대 되지 않을 거야. 그럴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 거야.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지수는 행복했어요. 아빠가 사업에 망하고 엄마랑 따로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잖아요. 세상에, 그렇게 멋진 그랜드 피아노가 있잖아요. 어떻게 그 위에서 죽을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성호 씨는 이런 게 이해가 되세요?”
나는 우선 그녀를 위험천만한 난간으로부터 떨어트리고 싶었다. 나는 희영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의외로 순순히 희영은 상체를 내게 맡겼다. 나는 차올랐던 숨을 누그러뜨리며 희영을 어르고 달랬다.
“희영 씨는 결핍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픔이 잊히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긴 거 아닐까요.”
희영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즉각적인 부정은 희영에게서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뇨. 어차피 채워질 수 없는 건 끝까지 채워지지 않아요. 고모가 언젠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거기까지가 제 분수였던 거죠. 넘볼 수 없는 삶 같은 거. 분명하게 그어진 선을 보고 있으면 태어나면서부터 있어왔던 결핍 같은 건 어차피 아무 상관도 없어져요. 어떤 선 너머는 애초부터 내게 허락되지 않았던 거니까. 누군가는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요. 그래서 저는 고모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지수도 그저 귀여울 뿐이었어요. 투정 부릴 상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권리인지 아직 모를 때가 가장 행복한 거니까.”
희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신식 주택과 한옥이 어우러진 거리를 응시했다.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저는 어찌할지를 몰라 다시 집으로 달려갔어요. 파란 한옥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오려 할 때 문을 열고 나오던 고모와 눈이 마주쳤어요. 고모는 다짜고짜 ‘어디야?’ 하고 제게 물었어요. 제가 달려온 방향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하고 말하려는데 고모는 이미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달려갔죠. 곧이어 구급대원이 도착했고 고모는 내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뒤 구급차에 함께 올라탔어요. 이내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구급차의 번쩍거리는 불빛을 보며 제가 궁금한 건 하나였어요. 나는 왜 할머니를 따라나섰을까. 주저앉아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데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지수가 어느새 대문 앞으로 나와 저를 쳐다보고 있었던 거예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웃을만한 일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수의 표정은 정말 즐거워 보였어요. 흥에 가득 차 보였다고요.”
희영은 앞서 가던 걸음을 멈췄다. 우리가 전에 함께 칠했던 울타리문이 그녀의 바로 옆에서 바람에 덜렁거렸다.
“바로 여기서.”
나는 그 순간 희영의 눈에서 파란 불꽃같은 게 번쩍이는 걸 보았다. 희영은 손을 뻗어 울타리문의 녹슨 경첩 부위를 매만졌다. 파르스름한 녹이 검붉은 재처럼 희영의 손 끝에 묻어 나왔다.
“윤색된 기억 같은 거 저한테는 허락되지 않나 봐요. 조금만 예쁜 색으로 기억되면 좋을 텐데. 모든 것들이 너무 선명해. 웃음소리와 바람소리. 아스팔트와 흙먼지 냄새. 지수의 찡긋거리는 눈과 파랗게 벌어진 입술까지. 아니라면 차라리 하나씩 부스러져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희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입매에서는 검고 지독한 석탄가루 같은 먼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쓰러졌던 할머니는 병원에서 잠시 의식이 돌아오셨나 봐요. 고모가 저와 지수를 데리고 급히 병원으로 갔어요. 하지만 고모는 지수를 복도에 두고 병실에는 저만 데리고 들어갔어요. 의식이 돌아온 할머니는 또 악다구니를 치고 계셨나 봐요. 한 손으로는 의사의 멱살을 잡았고 다른 팔다리는 모두 간호사에게 붙잡힌 채였어요. 난동을 피우던 할머니는 문을 열고 들어온 저를 향해 ‘저 죽일 년이 기어코 나까지 죽이려고 쫓아왔구나.’ 하고 쇠스랑 긁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어요. 할머니는 갑자기 병상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떨어졌어요. 고모는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 눈이나 귀를 가리지도 않았어요. 그저 벌어질 일이 벌어질 뿐이라는 듯 우두커니 옆에 서 있기만 했어요. 저는 할머니와 고모를 번갈아가며 쳐다봤어요. 의료진들은 분주히 심폐소생술을 하면서도 그중 몇몇은 불길한 눈으로 저를 흘겼죠. 저는 병실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고모는 붙잡지 않았고 지수는 묘한 눈길로 제게 손을 흔들더군요. 하굣길에 친구와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도도하게. 울보 동생을 달래기 직전에 간을 보는 언니 같은 모양새로.”
희영은 풀이 적당히 다져진 공간을 걸어갔다. 그리고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었다.
“집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폐허여도 제겐 달리 선택지가 없어요. 모든 게 갖춰져 있어도 실은 아무것도 없는 병원보다는 아무도 없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기가 나아요. 그러니까. 성호 씨.”
나는 주머니 속을 매만지던 손을 멈칫거렸다.
“받지 마세요. 그 전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