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54)

54.

by 작가 전우형

54.


철수세미에 베인 손끝이 또 따끔거렸다. 분명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인데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건 늘 그 옆의 약지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붉은 피로 물든 손을 조금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났다. 요즘 들어 그런 일이 잦았다. 언제 베인지도 모를 상처들이 자주 살갗을 쩍 벌리고 말간 피를 쏟아내는 일들이. 손에서 쇠냄새가 풍겼고, 나는 그 비릿함의 출처가 당연히 철수세미 일거라고 단정 지었었다. 하지만 언뜻 그보다 훨씬 오래된 피냄새였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상하게도 가끔 나는 피를 보면 그랬다. 그리고 기억할 수 없는 상처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나는 그 손으로 아까부터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희영을 담당하던 의사가 내게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절대, 절대 병원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희영 씨를 혼자 두지 마세요. 전화 꼭 받으시고요.”


첫 번째 당부를 지키는 건 이미 물 건너갔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만큼은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미움받는 일은 질색이었다. 그 대상이 나와 관련 없는 의사일지라도. 미움받는 건 작별의 전조였다. 그 끝에는 늘 예고 없는 이별이 나를 기다릴 것 같았다. 나는 희영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믿었다. 그녀 역시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에 치여 왔다는 걸. 그 충격에 몇 번이고 의식이 날아가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저 걷다가도 가끔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걸. 작은 소리나 먼 곳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비명을 들으면 온몸의 감각이 바늘처럼 곤두선다는 걸. 결국 숨이 차고 심장이 저린다는 걸. 그건 내가 겪어온 삶의 어둑한 뒤안길이었고 피해 갈 수 없는 현재였다. 그리고 희영은 나와 같은 처지였다. 그런 건 일일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표정과 안색만 보고도 상대를 알아차리니까. 다만 때로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른척할 뿐.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대로 희영을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 나를 잠시 노려보던 희영은 이미 열린 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걸려오던 전화가 끊어지길 기다렸다가 전원을 끄고 다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희영에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따끔거리던 손가락의 통증도 사그라들었다.


이미 동틀 무렵이 지난 뒤라 그런지 불을 켜지 않아도 안쪽은 어둡지 않았다. 나는 공연히 전등 스위치를 찾아 딸각거렸으나 오래전에 단전된 폐가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었다. 피아노방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예전에 희영과 이 집을 찾아왔을 때 함께 밀었던 그 작은 틈 역시 그대로였다. 희영은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명도가 짙은 회색의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 한쪽 벽에 기댔다. 텅 빈 집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어서 앉으려면 바닥뿐이었다. 바닥은 오래된 먼지와 발자국이 뒤엉켜 있어 완공이 덜된 공사현장 같았다. 나는 바닥에 깔만한 것을 찾기로 했다. 신문지 한두 뭉치쯤은 남아 있겠지. 하지만 이미 희영은 벽에서 미끄러지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희영이 물었다.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할만한 거라... 또 손끝이 따끔거렸다. 희영이 말했다.

“이 집은 그 후로도 한동안 할머니 명의로 남아있었어요. 지수가 죽기 전까지 고모와 저, 지수가 함께 살았지만 제가 여기 살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고모가 한사코 저를 같은 주소지로 이전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거든요. 고모는 이 집을 잘 꾸며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수 때문에 모든 게 흐트러졌겠죠. 아이가 목매달아 죽은 집이라고 좁은 동네에 소문이 파다했고, 팔리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지수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뒤에 이 집은 제 명의가 되어 있었어요. 저는 몰랐지만요.”


열린 문틈으로 바깥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나는 바닥에 앉아 빛이 들어오는 창쪽을 바라보는 희영을 선채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희영이 말했다.


“이제 들리죠? 피아노 소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어요.”

“뭘요?”

“여기서 뭘 해야 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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