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55)

55.

by 작가 전우형

55.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양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피아노방 문 앞에 섰다. 피아노 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 그건 이 그랜드피아노뿐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세차게 문을 밀었다. 쿵, 쿵, 몸 전체로 문에 부딪혀 갈수록 문 뒤에 쌓인 짐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묵직함이 가벼워졌고 문을 막고 있던 상자들이 한꺼번에 뒤로 쏟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상자 몇 개가 그랜드피아노를 건드렸는지 둥 하고 건반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는듯한 소리가 좁은 벽과 벽 사이를 울렸다. 나는 제법 벌어진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바닥에 널브러진 상자들을 발로 찼다. 그러고서는 자욱한 먼지를 헤치고 들어가 작은 커튼을 걷었다. 좁고 높은 창문으로 빛이 화악 쏟아졌고, 둥둥 떠다니는 먼지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기침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을 희영은 치켜뜬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희영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은 거칠다 못해 충동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내 행동에 대한 몇 개의 질문을 담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질문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희영은 열린 문 안쪽으로 고개를 밀어 넣고 두리번거리다가 천천히 상자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희영이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에요.”


물론 방문을 연 건 처음이 아니지만, 하고 희영은 생각했다. 나를 노려보던 지수의 시선이 서서히 회전하던 그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허공을 쓸던 그때.


희영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어지러이 뒤엉킨 상자들을 하나씩 들어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동안 묵묵히 상자를 옮겼다. 상자들 들었다 놓을 때마다 뽀얀 먼지가 버섯구름처럼 부풀었다. 희영은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기침소리에는 왠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지 않았다.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은 후, 희영은 테이프로 밀봉된 상자 하나를 뜯었다. 안을 보며 희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악보예요. 지수가 연주했던 곡들. 그리고 연주하지 못했던 곡들. 하지만 나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곡들. 문 너머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저는 숨을 참아야 했어요. 숨소리조차 방해였거든요. 숨소리가 고막 안에서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피아노 소리가 그물에 갇힌 것처럼 한데 엉켜 죽어갔거든요. 숨을 참는 동안은 요람처럼 고요해졌어요. 지수가 미워도 저 소리만큼은 미워할 수 없었어요. 고모는 저더러 방에 가 있으라고 했어요. 지수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저는 문밖을 서성거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어요. 가까이서 담고 싶었을 뿐인데. 조금 더 가까이서. 하지만 그조차도 예민한 누군가에게는 방해였겠죠. 하지만 고모는 몰랐던 것 같아요. 지켜주고픈 마음 역시 방해라는 걸. 고모는 지수에게 늘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어요. 아빠가 어떻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집이 어떻게 되었고, 그런 중에도 저 그랜드피아노를 어떻게 지켜냈는지 한사코 설명했어요. 지수는 그런 이야기를 견디지 못했어요. 제게 같이 있어달라고 했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지만 번번이 고모에게 가로막혔어요. 고모는 정말이지 집착이 심했어요. 마치 이제부터 자신이 이루어야 할 것은 저 그랜드피아노로 지수를 성공시키는 것뿐이라는 듯이 지수를 몰아쳤어요. 지수는 도망치고 싶어 했어요. 자기는 아빠랑 살고 싶다고, 제게 아빠가 사는 곳에 함께 가자고 했어요. 주소가 쓰인 쪽지를 펼쳐 보이면서.”


희영은 악보에 묻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차갑게 웃었다.


“지수가 보여준 주소의 첫마디는 다른 도시의 이름으로 시작했어요. 혼자서는 버스 한번 타본 적 없는 바보가, 가면 어딜 간다고. 그 가녀린 손가락으로는 걸레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주제에. 저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어요. 이참에 본떼를 보여주자. 너 차비는 있어? 하고 물었더니 지수는 통장 하나를 서랍에서 꺼내왔어요. 이걸로 은행 가서 찾으면 돼. 너 혼자서 가면 안 주실텐데? 아냐, 엄마 도장만 챙겨가면 돼. 그러더니 지수는 주머니에서 고모의 인감도장을 슬며시 꺼내보였어요. 저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어디 계속 가보자 싶었죠. 길 하나만 건너면 은행이어서 거기까진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하지만 은행에 들어섰을 때부터 저는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웬 아이 두 명만 들어서는 모양새가 한눈에도 이상했는지 제복 차림에 총집을 두른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어요. 어떻게 왔니? 하길래 이거요, 하며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죠. 아저씨는 엄마는? 하고 다시 물었어요. 엄마도 와야 해요? 하고 되묻는데 아무래도 일이 틀어졌다는 걸 알았죠. 아저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거든요. 엄마 전화번호 있니? 저는 저도 모르게 지수를 돌아봤어요. 그때 알았죠. 이미 지수가 사라지고 없다는 걸. 저는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하고 은행 문을 밀치고 나왔어요. 그런데 지수가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해 여름(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