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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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야, 지수야 하고 부르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어쩌지, 고모가 알면 날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그러면서 터덜터덜 길을 건너는데 지수가 저쪽 자동차 뒤편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거예요.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지만 그래도 지수를 잃어버린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막혔던 숨이 헉하고 튀어나왔어요. 잽싸게 가서 지수의 손을 붙들고 길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모가 골목을 서성거리다 우리를 보고 달려왔어요. 너희끼리 어딜 갔다 오는 거야, 겁도 없이! 하고 소리치는 고모 앞으로 지수가 얌체같이 먼저 나서며 말했어요. 언니가 이거 갖고 은행 가면 돈 찾을 수 있다고 해서, 하면서 통장과 도장을 고모한테 쓱 내미는 거 아니겠어요. 고모는 그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어요. 그저 지수가 내민 통장과 도장 뭉치를 들고 돌아서며 말했죠. 됐다, 얼른 들어가자. 하지만 저는 보았어요. 돌아서기 전의 고모 눈빛.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그 표정. 돌덩이처럼 굳은 낯빛. 어떠한 기대도 남지 않은 사람의 눈빛.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진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한 쌍의 무심한 시선.”
희영은 눈을 비볐고, 하얗던 그녀의 손등 위로 가뭄에 찌든 대지에 흩뿌린 빗방울 같은 얼룩이 드러났다. 마치 우주비행사가 열권(熱圈) 밖에서 촬영한 지구의 모습처럼, 조금은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그 얼룩들은 희영의 앙상한 뼈마디 사이로 수채화가 번진 것 같은 흐린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그 얼룩들은 어쩌면 낙인처럼 남아서 그녀의 지형을 영영 바꾸어버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희영이 말했다.
“어떤 시간들은 답을 정해둔 채 다만 흐르기만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저항해도 결국 끝은 정해져 있어. 거기를 벗어날 수 없고, 공연히 힘만 빠지고, 결국은 홍수에 떠밀려가는 나무들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거죠. 아무리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하늘을. 가끔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지만 그것들은 고작 우주의 파랗고 까만 얼굴을 잠시 가릴 뿐이라는 거. 본질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나는 결국 곁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고 만다는 거. 살아내는 동안 저는 그걸 도리어 입증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
나는 숨을 쉬는 일이 조금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 일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마쳐야 하는 일과처럼 어느새 버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희영의 말을 자르며 일어섰다.
“마른걸레 하나만 물에 적셔 올게요.”
희영은 그것을 의식한 듯, 아니면 의식하지 못한 듯, 앉은 그대로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 오래된 집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나는 걸레를 구하기 위해 편의점까지 나가야 했다. 집을 나서면서 잠시 고민했지만 적어도 이 집에서만큼은 희영이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건 묻거나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편의점을 찾다가 작은 할인마트를 먼저 발견했고, 거기서 2리터 생수 여섯 통과 마른행주, 빗자루와 쓰레받기, 청소용 세제, 스펀지처럼 생긴 수세미, 물티슈, 플라스틱 대야를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잠시 후 내가 돌아왔을 때, 희영은 악보들을 하나씩 바닥에 늘어놓은 채 이름 하나하나를 찬찬히 읽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나타난 나를 조금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게 다 뭐예요?”
나는 한쪽 벽에 그것들을 쓰러지지 않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겨울에 봄을 생각하는 것과, 봄에 봄을 느끼는 건 다르대요. 그게 우리가 겨울을 버텨내야 하는 이유라고, 어느 책에서 봤어요. 희영 씨가 그 겨울에 무엇을 생각했든, 지금 이 집에 돌아온 사람은 희영 씨뿐이에요. 그리고 봄은 청소하기 딱 좋은 계절이죠. 그러니까 우리, 청소해요. 일단 이 그랜드피아노가 잠들어 있던 바로 여기부터.”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추운 계절이었지만, 희영은 다행히 웃으며 일어났다. 나는 그 웃음을 볼 때마다 마음이 놓였다. 특별한 감정이나 서사 없이 갑작스럽게 조각되는 웃음이었지만 나는 희영의 미소가 자연스럽고 좋았다. 희영은 아플 때도 웃었고 힘들 때도 웃었다. 곧 쓰러질듯한 얼굴을 하고서도 희영은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미소도 사람을 닮는 모양이라고 내가 희영에게 우스개처럼 말했을 때, 희영은 또 같은 모습으로 웃곤 했다. 수줍어선지, 아니라고 생각해선지, 아니면 그저 어색한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미소에 인위는 끼어들 구석이 없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는 소매를 걷고 싱크대로 가서 대야에 물을 부었다. 희영은 바닥을 쓸었다. 먼지가 잔뜩 일어나며 또 주위가 반짝거렸고, 희영은 가끔 콜록거렸지만 나는 예전처럼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다. 그 기침소리는 내게 일시적인 위안이었다. 살아있는 자가 더 살아있기 위해 내는 기침소리. 몸속으로 들어간 먼지가 더 몸속 깊은 곳까지 침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 콧노래가 나왔다. 그리고 아무래도 생수를 몇 병 더 사 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야에 담긴 물을 쏟았다. 비눗물은 잠시 차올랐다가 서서히 내려갔다. 한참을 막혀 있던 통로들이 늘 그렇듯.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