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59)

59.

by 작가 전우형

59.


내겐 기억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백지처럼 아무 글씨도 없습니다만, 가까이서 보면 점자처럼 눌리고 들어간 자국이 보입니다. 빛에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 비추면 그 얇고 굵은 선들이 칼자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도마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거친 자국들이 함께 드러납니다. 무언가에 두드려 맞고 푹푹 패인 자국들이 나를 아프게 맞이합니다.


맞습니다. 제 기억은 많은 부분이 그렇듯,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꽤 공들여 썼던 모양입니다. 그게 정말 나였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그 자국들이, 서로 겹치고 어긋난 그 글씨들이, 색을 잃은 제 지난 시간들을 여전히 기억해 주는 것 같아, 몹시 기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고쳐쓸 방법을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고쳐 쓸수록 더 이상해집니다.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뒤틀린 기억들로 인해 나는, 언제부터의 나와 또 언제부터의 나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 사이가, 이어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삭아버렸습니다. 잘린 절단면의 신경이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없었던 기억들 때문에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환지통처럼 나는 감각할 수 없는 기억들로부터 저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만지려 애쓰다 지치고 맙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처음부터 몰랐던 건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보고 있지만 그게 당신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게 당신인지 물을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기억들은 점점 더 기울어갑니다. 대지와 가까워져 갑니다. 기울기가 짙어지고 그림자는 짧아집니다. 동그란 점처럼 하나의 지점에 수렴합니다. 그런 걸 당신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나는 그렇게 용감하지 못합니다. 그 일에 어째서 용기가 필요한지 묻지 마세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끝내 나는 당신을 이해시키지 못할 겁니다.


**


어제는 잠을 설쳤습니다. 설핏 잠든 사이 나는 긴 꿈을 꾸었나 봅니다. 헤프고 흔한 꿈이었습니다.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한 꿈이었습니다. 꿈도 주인을 닮아가나 봅니다. 꿈에서도 점점 지워지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나 느낌, 분위기 같은 것들만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풍선껌처럼 진득하게 남습니다. 그것들을 치워내려면 하루가 다 날아가버릴 정도로 꿈의 잔여는 집요합니다.


누워 눈을 뜨고 어두운 천장을 보며 생각합니다. 다시 잠들면 어쩌지. 같은 꿈이 이어지면 어쩌지. 그렇게 불안해하며 몸을 뒤척입니다.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이불을 덮었다가 다리 한쪽을 꺼냈다가 공처럼 말아 안았다가 다시 펼쳐 머리끝까지 덮습니다. 아직 긴 밤이 남았습니다. 시계를 봅니다. 시곗바늘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치켜뜹니다. 초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느새 들리기 시작합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귀에 대었을 때처럼 샤라락 거리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건드립니다. 잘게 부수어둔 초침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거대해집니다.


나는 또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십니다. 일어나 책상에 앉습니다. 스탠드를 켭니다. 어질러진 책상을 치웁니다.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물끄러미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어봅니다. 눈에 들어오는 제목과 전혀 생소한 책. 역시 이곳은 제가 사는 집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째서 아직 여기 있는 걸까요. 왜 이토록 무서운 공간에 다시 앉아있는 걸까요. 손에 닿는, 눈에 와닿는 이 감각들은 어째서 이토록 선명할까요.


나는 언젠가부터 생에 대한 미련이 말라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을 주지 않아서 마른 건지, 이미 뿌리까지 상해서 물을 길어 올릴 수 없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내게는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모님들은 대개 그런 이야기는 숨기니까요. 무한한 긍정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니까요. 그러나 나는 인생의 끝점 같은 순간을 늘 기다려온 것 같아요. 그건 압도적으로 명백한 빛과 같아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었나 봐요. 눈을 감아도 눈꺼풀 밖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그런데 희영 씨, 당신을 만나고부터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건 신기한 일이었어요.


희영 씨, 당신은 당신이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인다고 늘 말해왔잖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만난 후부터 더 살고 싶다,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지내게 되었어요. 그런 감각과 순간들이 너무 생소해서, 당신과 걷고 이야기하고 어깨에 기대 잠들 따마다 새롭게 기도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의 기도들을 모두 취소하겠다고. 나를 빨리 데려가 달라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그리고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들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어요. 그 고요를, 텃밭에 모종을 심을 때처럼 흙 속으로 단단히 다지고 눌렀어요. 거기서 아주 작은 의지라도 피어나길 바라며.


나는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거리로 나갔어요. 걷고 있으면 모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귓속에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어요. 무거운 등짐을 졌을 때처럼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강해졌고, 시작은 종잡을 수 없지만 더없이 확실한 감각들이 반짝거리는 무지개처럼 주변을 가득 채웠어요. 언제 갑자기 그것들이 사라질지 몰라 겁이 났지만 나는 매 순간 새로 알 수 있었어요. 살아있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숨 쉬는 느낌을. 핏방울이 온몸을 돌아 다시 나를 걷게 하는 느낌을. 이런 거였구나. 그렇구나. 그랬구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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