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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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럼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걸, 당신은 이미 알았던 거예요. 나는 이해받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의 그 숨찬 호흡에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달아오를 때면 한쪽 폐를 떼어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그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가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하고 내가 물었을 때 그 의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더군요. 처음부터 그가 내뱉는 말들은 믿음이 가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이의 속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의사가 정신건강의학과라니, 밀가루도 못 먹는 사람이 제과제빵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일이 세상에는 종종 벌어지나 봐요. 예를 들면 배만 타면 속이 울렁거리는 사람이 선원을 한다던가, 자기 속도 못 들여다보는 사람이 심리상담소를 차린다던가 하는 일들이요. 그럼 나도 살아도 되겠구나.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해도 되는지, 할 수 있는지,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구나. 흉내나 눈속임 같은 거였지만. 그저 당신이 멋져 보여서 따라 해 본 것뿐이었지만.
당신을 병원에 두고 온 다음날부터, 나는 묘하게 가슴이 저렸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는데 그날따라 커피를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 커피를 마시자. 얼마 전 셀프 세차장에서 고압 세차건만 멍하게 휘두르고 있는데 옆에서 전화받던 남자가 그러더라고요. 옛날엔 커피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돌아보니 저쪽 커피자판기 앞에 몇 사람이 모여 종이컵 하나씩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어요. 그쪽에서 쏟아져오는 엷은 커피 향이 허전하면서도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어요. 믹스커피를 저을 때처럼 뿌옇고 기대됐어요. 온갖 것들이 뒤섞인 불투명함이 섞으면 섞을수록 검게 변하는 유채색들처럼 시야를 온통 마비시킬 것 같았어요. 정말 그렇게 되어 버렸나? 나도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건가? 반드시 챙겼어야 할 무언가를 집에 두고 온 사람처럼, 지갑을 몽땅 도둑맞은 사람처럼, 온종일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것 같아요. 책을 폈다 접었다, 노트북을 덮었다 펼쳤다,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 그런데 자꾸만 떠올랐어요. 당신이. 당신과 걷던 공산성이. 당신을 만났던 주차장이. 갑자기 내려가던 짙게 선팅 된 창문이. 그 속에서 고개를 내밀던 피로한 눈동자가. 서서히 사라지던 검붉은 달을 바라보던 저녁이. 아스라이 내려앉은 집터가. 누군가는 그곳에서 잠들며 다음 날을 꿈꾸었을, 그러나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공터가. 밤이면 그 속에 보름달처럼 머물렀을 새벽빛과 끝내 잠들지 못했을 공기와 호흡들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처럼 들리던 공주대교의 울림과 당신이 늘 앉아 바라보던 금강의 물줄기와. 건너로 연등행렬처럼 빛나던 공산성의 야경이. 하지만.
어째서 그때 내게 연락했던 거예요? 왜 당신은 전화해 놓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나요. 나를 그곳에 찾아가게 했나요. 어느 밤에 베었는지 모를 밑동만 남은 버드나무처럼 멈춰 있던 내 하루를 어째서 다시 움직이게 했나요.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흐드러진 그림자를 어째서 내 발에 닿게 만들었나요. 그 아래 묻어두었던 추억이 매일 밤 새로 떠오르게 만들었나요.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나는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어요. 이미 종료되었다는 메시지를 우두커니 보고 서 있었어요. 그때부터 눌린 비닐봉지처럼 하루가 일그러지기 시작했어요. 너무 오래 눌려 있어서 그런지 평평한 바닥에 대고 손바닥으로 힘주어 밀며 펼쳐내어도 화석 같은 주름은 지워지지 않았어요. 오래 방치되어서 닦아도 소용없는 유리창처럼 보는 내내 흐릿했어요. 그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란. 망가진 하루가 다시 시작 돼버린 거예요. 수선되지 못한 채로. 전화 한 통 때문에. 그러나 곧 알게 됐죠. 우주가 원래 어떻든, 나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당신처럼, 외로울 때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걸. 비 온 뒤 먼지가 사라진 공기를 좋아하고 빗소리에 엉덩이가 가벼워지는 사람이란 걸. 차고 조금은 습한 공기를 코 끝으로 후 들이마시며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이란 걸. 맑은 날 숨겨진 조각 같은 여우비와 멀리 꿈꾸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무지개를 기어코 찾아내는 사람이란 걸. 집요하고 꼼꼼한 손과 눈으로 찢어진 책을 수선하는 사람이란 걸. 예고 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요. 길고 긴 주름 사이로 소금기가 차오르는 광경을 나는 불이 한두 개 켜진 기운 밤처럼 바라봤어요.
꽤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공주로 가는 길은. 도착했어야 할 시간을 이미 한참 넘긴 사람처럼 좀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었어요. 당신을 원망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시간이 남아있길 바랐죠. 당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그 전화 이전에. 우리가 멀어지려 할 때. 당신은 밀어내듯 말했어요. 결혼식에 와줬으면 한다고. 그 말은 내게 퍽 잔인하게 들렸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죠. 하지만 그때 당신은 왜 슬퍼 보였나요. 당신은 그때 왜 급히 얼굴을 돌렸나요. 도망치듯 버스에 탔나요. 가는 내내 돌아보지 않았나요.
버스 맨 뒷좌석에 당신이 가서 앉는걸 나는 끝내 바라봤어요. 흐린 뒷유리 너머로 당신을 닮은 그림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버스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어요. 이유 없이 열었다 닫았다 했어요. 거기 앉아 기다렸던 것 같아요. 버스가 더 이상 오지 않을 때까지. 사람들이 더 이상 타고 내리지 않을 때까지. 당신을 기다린 건 아니었어요.
나는 끊어진 전화가 궁금했어요. 당신이었는지 확인해야 했어요. 목소리로는 알 수 없으니까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몇 조각의 언어로는 부족하니까요.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말해야겠어요. 당신의 눈과 입술을 보며 물어야겠어요. 대답을 반드시, 확인해야겠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