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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연주회 초청장을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줄 사람이 없어서요, 하고 당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설명했어요. 혹시 피아노 좋아하세요? 하고 작게 묻기도 했죠. 흔들리는 시선이 바닥을 쓰는 걸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얼른 당신의 손에 쥐어진 봉투를 받아 들었어요. 별 모양 스티커로 봉한 남색 봉투를 손에 든 채로 당신을 바라봤죠. 잠깐 눈이 마주친 당신은 이내 시선을 틀며 끄덕였어요. 나는 봉투에 딱 맞게 끼워진 카드를 꺼냈어요. 밀착되어 있던 두 면이 서로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끝내 맞잡은 손이 풀리듯 카드는 결국 내 손에 쥐어졌어요.
그랜드피아노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카드였어요. 뒷면에는 ‘소중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글씨와 함께 날짜와 시간, 장소가 쓰여 있었어요.
3월 18일. 토요일. 오후 4시 30분.
토요일이면 올 수 있을 줄 알고 날짜를 잡았는데 바빠서 안된데요,라고 당신은 흘리듯 말했죠. 그리고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바쁘면 안 오셔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하고 다짐하듯 말하고 나서 당신은 밖을 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죠.
투명한 유리문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종소리로 사람들이 온걸 알곤 했어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공연히 울리는 종소리 탓에 빈 카페를 보며 심술이 나기도 했죠. 그런데 희영 씨가 그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내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어느새 멀리 걸어 나가는 희영 씨를, 나는 보고 있었죠. 그때 희영 씨의 뒷모습은 이제 막 시험을 마치고 나온 수험생처럼 홀가분해 보였어요.
당신은 그토록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죠. 당신의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그대로였어요.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반짝반짝 빛을 더했죠. 그도 그랬어요. 초췌하고 일그러져있던 그에게서 봄꽃처럼 새잎이 돋아나는걸. 몇 년째 신어도 밑창이 닳지 않은 당신의 파란 운동화처럼. 당신의 삶은 당신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그대로였어요.
겨울 어느 날, 소리 없이 내리던 눈처럼 당신이 카페로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쌓일 만큼 눈이 온 걸 몰랐고, 당신의 정수리며 어깨가 설원처럼 하얀 걸 보고서야 비로소 밖을 내다봤죠. 그때 당신은 내게 전했어요. 날이 참 좋아요,라고. 나는 눈밭에 새겨진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어요. 발자국들은 일정한 보폭과 깊이로 새겨져 있었어요. 그 눈을 밟던 소리마저도 옅은 눈발에 묻히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얕고 단아했어요.
당신의 이름을 안 것도 그 초정장 덕분이었어요. 그는 늘 그렇게, 바빴으니까요. 당신은 늘, 혼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오후 해가 내리쬐는 카페 테이블에서.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문득, 당신을 자꾸만 보게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러 나온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거든요. 분명 신경 쓰였을 텐데, 희영 씨는 그런 내색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애초부터 몇 시간 기다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당신은 평온해 보였어요. 그 무던한 인내가 내 시선을 내내 잡아끌었나 봐요.
그 후로도 한 시간쯤 더 지난 후에야 그는 카페로 들어섰죠. 그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종소리는 유난히 거칠고 컸어요. 그는 얼룩덜룩한 흰색 가운을 대충 접어 등받이에 걸고, 드르륵 의자를 끌며 당신 앞에 앉았어요.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여태 기다리고 있었어? 오래 걸릴지 모른다고 가라니까, 하고 쏘아붙였어요. 당신은 미안하다고 했어요. 잠깐이라도 보고 가려고,라고 그의 눈을 보며 작게 말했죠.
그 말을 듣자 이상하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았어요. 그때부터 남자는 자신이 겪었던 온갖 부조리를 토해내기 시작했어요. 마치 그것이 모두 당신 때문이라는 듯이. 그리고 마치 자신이 그런 하루를 겪었기 때문에 네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듯이. 당신은 때론 끄덕이며, 그의 손을 감싸며, 그의 투정에 귀를 기울였죠. 마치 그러라고 지금껏 당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부터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어요. 묵묵히 그 수모를 감당하고 있는 당신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