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64.
희영이 무대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온 날, 성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희영은 곧 퇴원했고 집에서 목을 맸다. 그리고 누운 채로 눈을 떴다. 희영은 성호가 미국에 잘 도착했는지 궁금했다. 신호가 끊어질 때까지 희영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통화 종료 마크가 그려진 빨간 버튼을 한참 누르자 휴대전화는 꺼졌다. 희영은 손을 툭 내려놓았다. 휴대전화는 바닥을 구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희영은 목에 돋아난 자국을 따라 손을 옮겨갔다. 차가운 손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왜 아직도 아픈 걸까.’
희영은 방으로 가서 진통제가 잔뜩 들어있는 플라스틱 통을 찾았다. 편두통이 심했던 희영에게 성호가 준 것이었다. 희영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것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이거 조심해야 해,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하고 말하던 성호의 입술이 떠올랐다. 눈을 꼭 감고 알약을 입에 쏟은 뒤, 희영이 느낀 것은 지독하게 쓴 맛뿐이었다. 희영은 이대로는 한 알도 삼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몇 번을 으드득거리며 씹어보다가 이내 희영은 하얀 가루를 뿜으며 토해냈다. 희영은 기어서 화장실로 들어간 뒤 세면대를 붙들고 일어섰다. 희영은 엉엉 울며 입안에 남은 가루와 잘게 다져진 조각들을 손으로 긁어냈다. 물 묻은 손으로 혀를 씻어내도 진득하게 남은 쓴 내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물을 마셨다가 이내 토해내길 반복한다.
희영은 테이블에 앉아 숨을 고른다. 엉망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걸레로 닦다가 다시 한번 욕지기가 치밀어 화장실로 달려간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와 목과 배와 가슴이 옥죄어온다. 희영은 바닥을 더듬어 다시 진통제가 잔뜩 든 플라스틱 통을 집어든다. 그리고 흔들어본다. 잘그락, 잘그락 소리가 난다. 희영은 물을 머금고 알약을 하나씩 입에 넣는다. 꿀꺽, 물을 삼키고 입안에 다시 물을 머금는다. 알약 하나를 입에 넣고 삼킨다. 다시 물을 머금고, 알약 한알을 넣고, 삼키고... 그러다 눈앞이 흐려진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희영 씨!”
성호가 나를 흔드는 게 보인다,라고 희영은 생각한다. 그는 출국했는데,라고도 생각한다.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요. 다시 걸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그가 아빠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아니다. 시야가 젖은 유리에 비치듯 번져간다. 그 사람이다. 카페에서 늘 나를 쳐다보던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그런데 왜 이 남자가 보일까. 나를 흔들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 잠든다.
다시 눈을 뜬다. 많은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여긴 어딜까. 그중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성호 씨다. 결국 돌아왔구나. 와줬구나. 희영은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가 손을 움켜잡는다. 섬세한 손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매끈한 손이다. 그러나 다르다. 손을 잡아당기자 그가 기울어지듯 내게 다가온다. 어째서 놓지 않는 걸까. 왜 계속, 나를 잡고 있는 걸까.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희영은 눈을 감는다. 눈물이 흐른다. 소란이 잦아든다. 서서히 그러나 왈칵, 멀어지다가 꺼진다.
“그 사람은요. 나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어요.”
희영은 침대에 누운 채로 창밖을 내다본다.
“오로지 앞만 보는 사람이에요.”
나는 묵묵히 듣는다. 그리고 시계를 본다. 오후다. 특별할 것 없는 오후. 맑고 따뜻하고 눈부신 오후. 나는 회전하는 손잡이를 돌려 등받이를 조금 세워주었다. 희영은 내게로 눈을 돌려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희영은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듯 잠시 이를 악물었다. “성호 씨와 저 사이에는.”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난산이었어요.”
아이가 죽고 나서 성호 씨는 크게 변했어요. 하고 싶은 말을 속 안에 쌓아두는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그 사람은 잘 벼려진 칼 같았죠.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나는 무서웠어요. 그가 드물게 취해서 나를 기다렸던 날, 나는 성호 씨가 알려준 이름을 찾아 밤거리를 두리번거렸어요. 이윽고 찾아낸 호프집 앞에서 나는 머뭇거렸어요.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앞이에요, 하고 짧게 대답했죠. 술집에서 성호 씨를 만난 건 아마 그날이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날,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어요. 새벽이 되었고, 두시 마감이라 이제 정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종업원의 안내를 들었어요. 성호 씨가 먼저 일어섰고, 나도 따라나갔죠. 좀 걸을까? 하고서 성호 씨는 앞서 걸어갔어요. 걷다 보니 금강 둔치였어요. 강변을 따라 난 소로를 걷다가 우리는 인도로 올라왔죠. 성호 씨가 택시를 잡아주며 말했어요. 우리 결혼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어요. 그대로 택시가 출발했고, 멀어졌어요. 함께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