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65)

65.

by 작가 전우형

65.


“달라진 건 없었어요. 성호 씨는 유학을 준비한다고 했어요. 나는 그러라고 했죠. 깎다 만 연필심 같은 일상이 이어졌어요. 무엇을 써도 알아볼 수 없는 글씨처럼 흐릿했어요. 언젠가 내가 이야기했던가요. 엄마는 나를 낳다 돌아가셨다고. 나도 차라리 그랬어야 했다고, 오래도록 되뇌었어요. 태중의 아이에게 속삭이듯, 태중의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소리에 익숙해지듯, 메시지는 점점 선명해져 갔어요. 하지만 되돌릴 방법은 없었죠. 그리고 어떤 종류의 일들은 종종 나의 선택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지어가니까. 자책도 시들해져 갈 즈음 성호 씨는 미국 의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그가 정말 기뻐 보여서 나도 기뻤어요. 그때만큼은 나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어요. 그의 벅찬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지금만큼은 마음껏 웃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성호 씨는 아빠와 이름이 같은 걸 싫어했어요. 내가 마치 죽은 아빠를 돌보듯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자주 이야기했어요. 사실은 그 반대라고, 나는 성호 씨를 만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아빠를 그만 떠올리게 됐다고,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성호 씨에게 설명했어요. 성호 씨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그 사람은 차분히 내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뒤이은 말들을 씻어내 버렸어요. 도달할 수 없는 말이나 해석할 수 없는 글씨처럼 나는 거기서 멈춰야 했어요. 벽을, 만난 것 같았어요.”


희영은 목에 남은 흉터를 어루만졌다. 깊이 파인 곳으로 살이 두텁게 채워진 흉터였다. 그 흉터는 비틀린 V자처럼 희영의 목을 가로로 길게 갈라놓았다. 그 위와, 아래로 갈라지지 못한 것들이 서로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상해요. 어디서부터가 나인지 모르겠어요. 만져지는 곳마다 감각과 온도가 달라요. 때로는 끓는 것 같다가 어느 때는 또 심하게 따끔거려요. 아무 느낌도 없다가 불쑥 단단한 손에 잡힌 것처럼 목을 조여와요. 가끔은 다른 사람이 나를 만지는 느낌이 들어요.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없는 것처럼, 나와 내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희영은 문득 손을 뻗어 침상 위에 얹어져 있던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내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희영의 턱과 목 사이 쑥 들어간 공간으로 나의 손이 놓였다.


“조금만 힘을 주면, 이 이상한 감각으로부터 영원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엄지 손가락에 닿은 희영의 목울대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물었다.

“연주회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희영의 눈동자가 하얀 천장을 향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양팔이 부르르 떨렸고, 나는 그녀의 목을 누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희영은 좀처럼 머금은 숨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의 안색이 진홍색으로 물들어갈 때쯤 풍선 바람이 빠지듯 오므려진 입술 틈으로 후 하고 긴 숨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녀의 열망이 다른 쪽으로 비껴간 것에 일단 안심했다. 그녀는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간과 공간 사이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위치에 우리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희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대상을 두지 않은 언어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두서없이 풀어져 나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거예요. 여전히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없고, 희고 검은건반에 손이 닿은 순간 지수의 혼탁한 회백색 눈이 떠오를 뿐이었죠. 성호 씨는 나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가 정신과를 택한 것도 같은 이유였어요. 그는 내 탓이 아니라고 했어요, 지수가 죽은 건. 그리고 애물단지처럼 남은 그랜드피아노를 내가 아무렇지 않게 친 것도. 고모가 잔짐을 정리하러 집에 돌아왔던 날,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어요. 고모는 경악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어요. 내가 치던 건 지수가 죽은 날 악보대에 펼쳐져 있던 곡이었어요. 그 곡을 마저 연주하는 게 지수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고모가 받은 느낌은 달랐나 봐요. 진득한 혐오로 가득 찬 고모의 눈을 피해 나는 고개를 돌렸어요. 그러나 소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전달되고야 마나 봐요. 고모의 악에 받친 숨소리에 알약을 녹이듯 스며든 분노가 벽을 메아리쳐 여러 방향에서 귀를 파고들었어요. 그 순간 건반 위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나 봐요, 나도 모르게. 가온 ‘도’ 였을 거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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