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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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은 오른손을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가서 곧게 폈다. 그리고 마디마다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를 고요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건반에 손을 얹듯 자신의 손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은 활대에 눌린 현처럼 분명한 탄성을 머금고 있었다.
“음계 하나가 짙게 맴도는 공간을, 나는 이제 막 이국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처럼 돌아보았어요. 시야의 끝이 닿은 지점을 헤아리며 천천히 고개를 틀었어요. 내가 속한 공간을 차분히 되짚어보겠다는 심산이었죠.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벽처럼 밀려들었어요. 지수가 저울추처럼 길게 메어져 있던 자리도, 그 아래 변색되어 가는 검붉고 끈적한 생명체의 잔여도, 누군가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기 위해 표시해 두었을 하얀 자국도. 모든 게 그대로인 곳에서 나는 지수 대신 거기 앉아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뜨거운 증기에 빠진 것처럼 눈이 화끈거렸어요. 나는 다급히 손을 들어 눈을 감싸 쥐었어요. 양손이 머금었던 냉기에도 불구하고 안구를 불로 지지는듯한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았어요. 미끈한 열기가 하나둘씩 손가락 사이의 가느다란 틈새로 흘러나오기 시작했죠. 악취에 속이 메슥거렸어요. 장기의 위치들이 한바탕 뒤집힌 것처럼 쓰고 역겨운 기운이 목젖 바로 아래에서 요동쳤어요. 다문 이 안쪽으로 끔찍한 비명들이 달려와 부딪는 게 느껴졌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심장이 수축기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것처럼 가슴이 조였고, 정신이 가장 가까운 곳부터 겨울 호수처럼 굳어갔어요. 아주 멀리서, 몇 고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울부짖음이 바로 옆의 창끝처럼 매섭게 신경을 파고들었어요. 하지만 고통은 없었어요. 모든 신경이 뿌리에서부터 잘려나간 것 같았어요. 몇 미터 두께의 빙하 속 화석을 보는 것처럼 눈앞의 세상이 쑥 멀어졌어요. 그때부터 맴도는 건 울음소리. 오직 울음소리였어요. 입을 단단하게 가린 손을 저미듯 배어나는 울음소리.
나는 고모를 불렀어요. 아니, 부르려 했어요, 몇 번이나. 하지만 고모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어요. 고모를 쫓아가서 붙잡고 싶었어요. 내 상태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어요. 밀랍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그 일자 의자에서 나를 분리시킬 수 없었어요. 나도 이해할 수 없던 그 순간의 마비와 침묵을, 누구에게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거예요.
뒤늦게 달려 나간 길가에서, 나는 망연히 한쪽을 건너다보았죠. 그러다 닿았어요. 길 건너 홀로 선 포플러 나무가 높이 솟은 언덕에. 봄가을엔 해 질 녘이었고 여름엔 아직 낮이 한창이었죠.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었어요. 달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어요. 나는 포플러 나무가 잘 보이는 언덕에 엉덩이를 대고 무릎을 안았죠. 포근했어요. 불어오는 바람도, 내리쬐는 하늘도. 마른 풀이 몸을 받치는 촉감도. 거기가 누군가의 봉분이라는 건 당시의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차라리 죽은 사람 곁에 눕는 게 친숙했어요. 달아나거나 다시 잃어버릴 걱정 없는 그 순간이.”
나는 희영을 따라 참고 있었던 숨을 터트렸다. 그 숨소리가 잠시, 희영을 여기로 데려온 것 같았다. 겹겹이 발라진 창호지같이 무겁게 굳어있던 희영의 안색에 옅은 변화가 일었으나 그것은 곧 구름 넓은 날 비친 해가 걷히듯 순식간에 더운 어둠으로 치환돼 버렸다.
“그랜드피아노 밖에 남지 않은 그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피아노를 만지는 것뿐이었어요. 나는 그 공간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지워지지 않는 자국들이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 몇 번이고 걸레로 닦았어요. 서로가 서로의 발을 밟은 채 놓아주지 않는 발자국들을 하나씩 떼어내듯 지우고 문질렀어요. 쏟아진 악보와 책자들을 한 곳에 모아서 새로 담고, 덜렁거리는 전등에 메어진 줄을 잘라냈죠. 그리고 일자전등의 전선을 다시 천정의 구멍으로 밀어 넣고 고정했어요. 나사를, 새로 조였어요.”
희영은 시선은 줄곧 침상 끝 어딘가에 정지해 있었다.
“그런데 우습죠. 그깟 것이 숨이 다할 때까지 버텨주었다니. 줄과 못 따위로 얼기설기 연결된 인위의 강도가 생명보다 강하다니. 나를 매달았던 건 그토록 허무하게 끊어져 버렸는데. 화가, 치밀었어요. 어쩔 수 없이 삶을 재개한 적은 있었어도 그게 진지했던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조여 오는 숨통 속에서, 막막할 정도로 하나도 와닿지 않는 호흡 속에서, 나는 또 살아보고자 발버둥을 쳤던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