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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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살집이 거의 없는 그녀의 손가락은 건반 위의 숱한 시간을 증명하듯 길고 매끈하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장맛비처럼 곧게 세워진 손가락들을 한데 모아 붙여도, 면(面)은 보잘것없었다. 드러난 입가는 시종 잔떨림이 멎지 않았고, 희영은 솟구치려는 무언가를 억누르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희영의 악력은 고사(枯死) 직전의 생기를 움켜쥐는 일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의 힘줄과 핏줄은 파르스름하게 부풀어 있었으나, 죽음 직전의 발버둥을 재현한다고 하기에는 희영의 안간힘은 시종 삶과 멀어지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가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거리를 두고 들려왔다. 으깬 감자처럼 뭉개진 단어들이 가끔 침묵에 묻혔다. 그런 침묵의 앞뒤로, 나는 명백한 공백을 느꼈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으레 놓여야 할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손에 잡히거나 발에 닿아야 할 어딘가가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거기를 건너고 있었기에, 나는 투명한 지지대 같은 것을 붙잡으려 애썼다. 내가 들을 수 없을 뿐, 그 침묵은 어쩌면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수가 연습하던 방문 앞에 살며시 등을 대고 앉아, 나는 귀를 붙였어요. 숨 죽인 채 그러고 있으면 나무 문을 타고 소리와 진동이 묻어났어요. 그 시간을, 나는 무던히 기다렸던 것 같아요. 가뭄처럼 메말라있던 물리(物理)를 벗어나 다른 곳에 머물 방법은, 그게 유일했으니까요. 소리와 진동이 하나씩 형상을 갖추고, 그들이 모여 역동을 이루는 동안 나는 돌연 엄마를 떠올렸어요. 나를 안은 엄마가 내게 눈을 맞추었고, 잠들었음에도 나는 엄마 품인걸 알았어요. 머리가 잠든 시간에도 몸은 꾸준히 세상과 교감하고 있었어요. 심장이 만져졌고 달큼한 젖내는 코끝을 간질거렸죠. 입을 오물거리며 무딘 잇몸으로 젖을 빨았어요. 미끈거리는 물방울이 좁은 틈을 비집고 입가를 적셨고, 나는 지체 없이 그것들을 꿀꺽 삼켰지요. 숱이 없어 그대로 만져지다시피 한 머리를 엄마는 아주 천천히, 같은 지점에서 같은 지점으로 어루만졌어요. 나는 그 순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죠. 안쪽의 동향에 집중해야만 했어요. 연주가 멈추거나,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면, 나는 다시 숨을 참고 문에서 얼굴을 땠어요. 그리고 바닥을 닦듯 엉덩이를 천천히 뒤로 밀었어요. 닫힌 문이 혹여나 덜컹거릴까, 작업은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이루어졌지요. 심지어 접었던 무릎을 펼칠 때 나는 소리까지도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어요.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끝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지요. 그런 철수를, 나는 늘 성공적으로 마쳤어요. 그러고는 발끝을 들고 방으로 갔지요.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렸어요. 지수가 가끔 그림에 관심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 다른 면을 펼쳤어요. 하지만 그 아이가 내 그림을 보고도 그 유래나 배경에 대해 어떠한 짐작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나는 공책을 하나 구했고, 오선지에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를 그렸어요.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음표를 표시했어요.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흠칫하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지요. 긴장 속이었지만 그 두근거림이 싫거나 지겹지 않았어요. 그건 정말,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나는 정리를 마친 지수의 피아노 방에서, 그때의 음계와 박자를 떠올리며 건반을 짚어 나갔어요. 어느 순간부터 작지만 확고한 기운 하나가 손가락을 저절로 움직인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그 기운이 지수일 거라고 믿었어요. 섬뜩했지만 반갑기도 했어요. 원한다면 함께 해주길 바랐어요. 지수만 원한다면.”
희영의 떨림은 어느덧 멎어 있었다. 그러한 침묵이 이어졌다. 차분히 아랫배 언저리에 놓인 그녀의 두 손 역시 모종의 압박에서 놓여난 듯 엷은 이불선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벌어지는걸 나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늘 보던 장면과 다른 각도나 공간에서, 희영은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수와 나는 사촌이긴 했지만 닮은 점이 없었어요. 사소한 유대조차도 우리 사이에서는 생략되기 일쑤였죠. 그렇다고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어요. 서먹해 하긴 했지만 지수는 외동이었으니까요. 언니 같은 존재가 신기하긴 했던 거겠죠. 지수는 매력적인 아이였어요. 구김살이 없었죠. 재고 따지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내뱉은 지수의 말들이 차라리 나를 편하게 했어요. 싫은 걸 분명하게 말하는 것만큼 내 활동반경을 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없었거든요. 이건 내거니까 건들지 마. 여긴 절대 들어오면 안 돼. 이건 언니도 써도 돼. 제 것도 아닌 걸 제 것 부리듯이 허와 불허를 정해주는 말투도 흥미로웠어요. 어차피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랬던 지수의 태도가 슬며시 바뀐 날이 있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