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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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맡을 향하던 희영의 고개가 부러진 가지처럼 아래로 툭 꺾였다. 꺾어진 고개를 따라 그녀의 눈동자도 얇고 병들어 보이는 이불 끝자락으로 뉘었다. 해어진 자리는 그녀의 복숭아뼈처럼 봉긋 솟아 있었다. 줄여 담을 수 없는 희영의 시선 안에서, 나는 오래된 허기를 느꼈다. 그 허기가 언제인지도 모를 아침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그러니까 아침을 기다리던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초봄의 바람치곤 거칠었다. 비바람이 창을 긁는 소리에 감았던 눈이 자꾸만 뜨였다. 귀마개를 하고 안대를 써도 헝겊을 억세게 찢는 듯한 소리는 쇠꼬챙이처럼 흉골 사이를 찔러 왔다. 알 수 없는 고통에 한참을 몸부림치다가, 그 쌕쌕거리는 소리가 가쁜 호흡을 닮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그 꿈은 길고 난감하며 모순적인 사건의 연속인 지루한 삼류 영화 같았다. 인상착의와 이름과 배경이 서로 다른 인물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지만 그들은 지극히 독립적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났고 갑자기 만났고 갑자기 서로를 헐뜯었다. 나는 궁지에 몰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꿈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났다. 새삼 감사하는 마음으로 벽을 올려보았을 때는 새벽 네시였다. 축축한 베갯잇에서 간신히 머리를 덜어낸 뒤, 사람 냄새가 잔뜩 풍기는 이불을 빠져나오자 온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떼었을 때, 나는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머그잔 가득 찬물을 따라 마셨다. 그 후의 느낌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졸리지 않았고, 흉통도 멎어 있었으며 모든 감각들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나는 책상에 앉아 먼동이 틀 때까지 무언가를 했고,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다 가벼운 허기에 엉덩이를 뗐다. 그런 활기는 오랜만이었다.
스크램블드에그에 프라이팬에 대충 뒤집어 겉만 익힌 모닝빵을 곁들여 먹고 집을 나섰다. 그때 처음 마주한 광경은 폐허를 연상케 했다. 마구잡이로 흩어진 꽃잎들. 대빗자루로 매질이라도 당한 걸까. 붉은색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도로의 가장자리, 그리고 나무 아래 세워진 자동차들 위는 점묘화처럼 벚꽃 알갱이 다발들이 굳어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이파리들이 짓이겨진 모습은 지난밤의 질곡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해는 분명 떴을 것이나, 구름이 짙었다. 빛줄기는 저 위쪽 어딘가에서 간신히 희뿌연 광망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사위는 이른 아침이라기보다는 무거운 밤의 초입 같았다. 한잎 두잎 피어나던 벚나무가 간신히 봄기운으로 채워진다 싶던 게 엊그제였다. 완연한 분홍에서 헐벗은 초록으로,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벚나무를 보며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한기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나는 봄의 향방을 더욱 헤아릴 수 없게 돼버렸다.
내가 그 짙고 무겁던 길가로부터 돌아오게 된 것은 고르다 점차 굵어지는 밭은기침소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밤새 창을 긁던 비바람과도, 얇은 옷차림을 비웃던 아침의 한기와도 달랐다. 나는 희영의 호흡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안에 스민 질량을 가늠하려 했다. 하지만 희영의 기침 속에서 나는 어떤 그리움이나 분노, 울분 혹은 분명한 적의를 찾아낼 수 없었다. 기침은 이내 잦아들었다. 그녀의 마른 손등에 눈물자국이 묻어났지만 오히려 그런 분출은 차라리 반가울 정도였다. 희영의 굽어진 시선은 오래된 앨범에 응착된 먼지를 걷어내듯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비스듬히 호를 그렸다.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어요. 그날따라 피아노방 문이 열려 있기도 했고. 문틈으로 지수의 고개 숙인 모습이 보였어요. 선생님은 지수 옆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었어요. 고운 목소리와 절제된 언어로도 예리하게 한 아이의 자존심을 저밀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분명히 느꼈어요. 뭐가 잘못됐는지 말해보렴,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고, 지수는 우물쭈물했어요. 선생님은 다시,라고 끝이 분명하게 말했어요. 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심한 듯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어요.
듣기에, 지수의 솜씨는 늘 듣던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자연스럽고, 흠잡을 데가 없었죠. 하지만 선생님은 계속 같은 곳에서 연주를 멈춰 세웠어요. 그만, 이라는 단호한 말에 흘러나오던 음표 다발이 일제히 잘려나가는 것 같았어요. 지수야, 하고 말한 뒤 선생님은 한동안 그 아이를 바라봤어요. 선생님의 곧은 등 너머로, 고개를 외튼 지수의 한쪽 눈이 보였어요. 그러다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죠. 이제 막 현관으로 들어서다가 토끼눈을 뜨고 자기 쪽을 쳐다보는 사촌언니와.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선생님도 누군가 집에 들어왔다는 걸 당연히 알아차렸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만할 생각이 아니었던가봐요. 다시!,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고, 지수는 내쪽을 노려보다가 손끝이 흔들렸어요. 음표가 노닐던 광장 어딘가가 갑자기 붕괴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지수의 연주는 멈췄어요.
나는 벽 뒤로 피했지만 지수가 나를 봤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벽을 등진채 생각했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려야 하나? 하지만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알고 싶었어요. 어째서 선생님이 저토록 분노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숨죽이고 이어지는 연주를 들었어요.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고, 방문이 벌컥 열렸어요. 아직 날이 차가울 때라, 현관에 뭉쳐있던 냉기가 쑥 밀려들어왔어요. 지수는 화가 나면 말이 줄어드는 아이였어요. 시종 떠벌이듯 벌어져있던 입술이 그날따라 일자로 꾹 다물어져 있었죠. 노려보는 눈빛을 등뒤로 느끼며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어요. 흥분을 가라앉히는 숨소리가 기차처럼 가까워졌다가 멀어진 뒤,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좋은 구경 했겠네.
그런 거 아냐, 지수야.
그래서, 소감은? 왜 혼났는지 언니는 알겠어?
아냐, 나도... 그렇지만 조금 가볍고 빠르게 쳐보면 어떨까? 아깐 조금 무거웠던...
언니, 지금 무슨 말인지 알고 떠드는 거야?
문이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돌아봤을 때 지수는 없었고요. 그 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요. 시간을 바꿨는지 지수의 과외를 다시 볼 일도 없었고요. 며칠 뒤, 지수가 선심 쓰듯 피아노 방에 들어오게 한 뒤 연주를 들려주었어요. 그리고 느낌을 물어왔어요. 그때 알았죠. 지수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어요.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여전했어요. 그렇잖아요. 모든 걸 갖고 태어난 그 아이가, 구멍 투성이인 나를 부러워한다니. 하지만 오래지 않은 일이었어요. 지수가 목을 맨건. 그러니까 그게 나 때문인지는 이미 중요한 게 아닌 게 돼버린 거예요. 나는 어차피 그날, 또 한 번 되돌아갈 곳을 잃은 거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