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82 / 마지막 회)

82. / 마지막 회

by 작가 전우형

82.


“꿈이 아름답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꿈은 혼란 투성이고 줄 듯 말 듯 약 올리고 애써 만든 평정을 무너트려. 원치 않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걸 떨쳐버릴 수 없게 해.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다고. 그 말을 쓴 사람은 적어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꿈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모든 꿈은 그 순간만큼은 단단한 현실이야. 꿈이 생생하면 생생할수록 깨어난 이후는 지독한 냄새를 풍겨. 나를 머리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그런 냄새.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고 마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 핏줄을 타고 뇌로 직접 침투하는듯한 끔찍한 기분이야. 지금도 그 냄새가 내 몸 어디에선가 풍겨오는 것 같아. 그리고 속삭여. 실로 묶어 나를 당기는듯한 목소리로. 그러면 나는 걸어. 걷고 또 걸어 가. 어느새 도착해 있어. 예전에 내가 살던 그 집에. 녹슨 철문이 바람에 가끔 끼익 끼익 하고 흔들려. 열린 문틈으로 풀에 묻은 이슬 냄새가 풍겨와. 소스라칠 만큼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쇠비린내처럼 참혹해. 죽은 줄 알았던 고양이가 옆에 서 있어. 꼬리를 말고 앞다리와 뒷다리를 가지런히 모은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어. 나를 향해 소리 없이 울어. 그러면 나도 눈밑이 축축해지는데 닦이지 않아.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만 선명해. 내가 보는 곳에 내가 서 있어. 고양이가 나를 보듯이 나는 나를 보고 있어. 아니, 나는 엄마를 보고 있어. 아빠가 문에서 걸어 나와. 두 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뻗어. 나는 걸어가. 네 발로. 고양이인 채로. 그러다 잠에서 깨. 나는 내 몸을 더듬어. 손가락이 다섯 개인지, 날카로운 발톱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몸에 털이 돋아나 있지는 않은지, 소름 끼치는 느낌으로 확인해. 그러다 멈춰. 숨 막히는 기분으로 밖으로 뛰쳐나가서 하늘을 봐. 달라지는 건 없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 조금이라도 이곳과 멀어지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 먼 곳을 오래 보고 있으면 거기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잖아. 여기서 가장 먼 곳은 우주니까. 빛의 속도로 수억 년을 가도 우주의 끝에는 도달할 수 없대. 우주는 그것보다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대. 그게 위안이 돼, 나한테는. 어쩐지, 조금 덜 초라해지는 것 같거든.


왜 우리는 잃어버린 후에야 그리워하게 될까.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가서야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될까.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꿈꾸는 걸까. 바라는 걸까. 옆에 있어서 언제든 만질 수 있고 말을 걸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기댈 수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아니,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걸까. 함부로 하는 걸까. 짓밟는 걸까. 방치하고 무너트리는 걸까. 그리고 왜 누군가는 그 모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견디는 걸까. 저항하지 않는 걸까. 나무처럼 살아가는 걸까.


그 방법밖에 모르니까. 나무는 그 수밖에 없으니까. 이미 외통수에 걸려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강해. 나무가 우리보다 훨씬 더 끈질겨. 오래 살아남고 오래 기다릴 수 있어. 시든 잎이 삭아서 흙이 되는 시간을 기다릴 때마다 연습하는 거야. 추운 계절동안 목질 안에서 버티는 법을 익히는 거야. 달아날 수 없으니까. 배수의 진을 쳤으니까. 다리가 불탔으니까. 유일한 방법은 뿌리를 지켜내는 거란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아니까.”


나는 세워지는 나무들을 보고 있었다. 하나둘씩 세워지는 나무들은 곳곳에 솟은 십자가 같기도 했고, 무덤마다 세워진 표지석 같기도 했다. 희영은 그렇게 말했다. 나무는 강하고 우주는 멀고 꿈은 끔찍하다고. 덮어지는 흙 안에서 그녀는 편안해졌을까. 건너편의 뾰족한 첨탑 아래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우주를 향해 팔을 뻗고 있을까. 몇 년 전 나는 희영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성호는 죽은 사람과 예식을 올리겠다며 내게 청첩장을 보내왔다. 그것도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그 청첩장이 내포한 함의가 무엇이건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장소는 공주의 한 성당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언덕 건너편, 여름 앞에 서 있다.


(끝)


* 구상하고 계획하고 흐트러지고 다시 쓰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동안 묵혀두었다가 천천히 읽어볼 예정입니다. 아마 전체를 새로 쓰게 되겠지요. 그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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