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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Nov 06. 2023

내게 허락된 시간

에세이

  바람이 거셌다. 어느 정도로 거셌냐면 밖에서 나뒹굴던 낙엽들이 카페 안까지 밀려들 만큼 거셌다. 나는 인도를 빼곡하게 덮은 낙과를 피해 걸었다. 까치발로 걷다가 디딜 데가 없어 훌쩍 멀리뛰기를 했다.      


  문을 닫으니 고요해졌다. 펄럭이는 천막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토록 완벽한 차단이라니. 11월이 새삼 멀게 느껴졌다. 이틀 뒤면 입동이었다. 헐벗은 은행나무를 보며, 길가에 수북한 낙엽을 보며, 나는 내게 허락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아주 젊은 나이에 그 시간을 남김없이 사용했다고 단정 지은 적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 시기는 내가 가장 왕성하게 일하던 시기였다. 나는 절망이 서둘러 찾아오는 타입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번 결정하고 나면 번복이 어려운 성격이었고,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저항하지 않는 것이 책임 있는 태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라는 의문이 들었다.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을까. 나는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니까 허구였다. 구체적이지 않은 기억은 모두 허구에 기반한다. 내가 실존했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두 허구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마저도 허구였거나.     


  그러나 종소리는 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바람이 출입문을 들썩일 때마다 물고기 모양의 종에서 소리가 난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커피를 내리다가도, 잔을 정리하다가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도, 종소리가 들리면 출입문을 흘끗 쳐다보게 된다. 그리고 사기당한 이의 심정이 된다. 나는 사기당한 사람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는 바람만큼이나 빠르게 부는 구름을 보며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불이 붙었고, 분노와 회한이 들불처럼 번졌고,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재가 남지 않는 마음에서 찐득하고 새까맣고 불길한 그을음이 묻어났다.    


  아주 오래 잔 것 같은데 십 분밖에 흐르지 않았거나 깜빡 눈만 감았다 떴는데 몇 시간이 지나있을 때가 있다. 하나의 고통이 어떤 고통을 압도할 때 그런 마법이 일어난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달라지고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나는 그런 일들이 공감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시간에 대한 공감. 꿈에 대한 공감. 고통에 대한 공감. 타인에 대한 공감. 과거에 대한 공감. 자연에 대한 공감. 신에 대한 공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공감.     


  물론 마냥 사기는 아니었다. 종이 울릴 때마다 이른 낙엽이 하나씩 다녀갔으므로. 카드 기계가 말썽이었고 외국인과의 대화는 버거웠지만 드러난 날씨보다는 괜찮은 날이었다. 가문비나무처럼 바늘 모양의 잎으로도 서로를 껴안을 수 있기를 바랐다. 비좁은 마음이 옆 사람을 밀어내지 않도록. 가까운 이의 살내음을 맡으며 그의 하루를 보듬고, 하루치 언어가 담지 못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잠든 얼굴을 보며 한숨짓던 시간과. 아픈 데는 없는지. 식사는 제때 했는지. 속상한 일은 없었는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고민은 없었는지. 


  그러다 잎이 지고 바람에 날아가고 커피는 식고. 먼 미래의 어느 지점에 놓아둔 장면을 슬쩍 꺼내 보며 내가 포기한 것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소망들을 그려보았다. 아지랑이들이 꼬물꼬물 모여 작은 동네를 일구는 모습을 봤다. 이토록 소란스러웠음을, 밝은 웃음으로 인사하여도 내게 허락된 시간이 거기까지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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