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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15. 2024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

소설

  제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 차고 비가 심한 정오였다

  무언가를 지워낼 시간

  마음껏 고독할 시간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12.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


  하루 사이 기온이 15도나 떨어져 있었다. 꽁꽁 언 시트에 앉아 아내가 탈 차의 원격 시동부터 걸었다. 디젤 기관에서 사용하는 압축 점화식은 겨울만 되면 시동 문제를 일으켰다. 중학생인 첫째가 베트남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외할머니와 동행하는 4박 5일간의 일정이었다. 아내가 첫째를 공항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다른 두 아이도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6학년이 된 둘째가 저항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다. 아내는 철없는 사내아이 둘에게 집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성공) 시동이 걸렸습니다. 10분 후 시동이 꺼집니다.’라는 메시지가 전시됐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나는 비로소 내 차의 시동을 걸고 히터 노브를 시계 방향으로 끝까지 돌렸다. 찬 바람이 확 쏟아져 나왔다. 누적된 한기를 배출한 후에야 온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련을 굽히지 않는데 믿음은 유용한 수단이었다. 덜덜거리는 진동이 잦아들 때까지 나는 잠시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한파에 대한 소식이 주를 이뤘다. 프리미어리그 순위표를 올렸다 내렸다 할 때쯤 준비운동을 마친 차가 조금 조용해졌다. 아파트 입구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손을 흔들며 서로의 행처로 흩어졌다.


  카페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교차로를 두 번 건너면 논밭 한가운데로 이어진 한적한 도로가 나타난다. 간혹 등장하는 경운기나 농기계를 제외하면 교통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차량이 길을 막고 있었다. 나는 반대 차선을 살피며 추월해 지나갔다. 엔진에서 잠시 굉음이 울렸다. 노견이 혓바닥을 내밀고 달려가는 것 같았다.


  4차선 도로에서 좌회전하면 터널이 나오고, 터널을 지나면 국제대교를 건넌다. 얼어붙은 안성천과 평택대교가 시야에서 멀어지면 다시 한적한 길이 나타난다. '함정, 도두'라고 쓰인 표지판을 지나 일종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파란 지붕의 축사 옆에 선다.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넉넉히 먹는 게 좋다. 최소 눈먼 신호 3번은 받아야 통과할 수 있다. 시속 60km 과속 카메라를 지나면 CPX 사거리에 서고, 이제 좌회전 신호 한 번이면 카페에 도달할 것을 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키를 꽂아 자물쇠를 돌리고 문을 연다. ‘OPEN’ 램프를 켜고 카페 내부를 쓱 훑어본다. 가스난로 레버를 돌리자 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튄다. 면이 하나둘씩 붉은빛으로 채워진다. 잠시 그 앞에 서서 손과 발을 녹인다. 따뜻함을 기다려왔다는 걸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추출 버튼을 눌러 샤워 스크린을 세척한다. 가래 낀 소리가 매끈해질 때까지 몇 번 더 누른다. 추출 바를 행군 다음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첫 에스프레소에는 그라인더에 분쇄된 상태로 남아있던 가루가 섞이기 때문에 텁텁함이 느껴질 수 있다. 혀 밑에 넣어 맛을 확인한 후 뜨거운 물에 붓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입천장에 닿으면 비로소 하루를 시작한 느낌이 든다.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바라보며 베란다로 집에 들어가려다 추락해 사망했다는 남자의 사연을 듣는다. 그는 열쇠공을 부를 몇천 원조차 없었던 걸까? 아니면 몰래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의 죽음은 슬프거나 안타깝다기보다 궁금증만 자아냈다. 나는 문득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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