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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17. 2024

당신이 지금보다 30퍼센트는 더 나약했으면 좋겠어

소설

  힘들지 않은데 눈물이 났다

  미워하던 사람과 영화관을 갔다

  고장 난 것이 분명했다

  나와 세상 중 어느 한쪽이


 

  13. 당신이 지금보다는 30퍼센트쯤 더 나약했으면 좋겠어  


  아내에게서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카페 근처를 지난다. 나는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하기로 했다. 6시가 되자 밖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달도 없는 저녁이었다. 그믐이었지. 그믐에 달을 보려면 새벽에 눈을 떠야만 한다. 하지만 올해부터 아침잠이 늘어 그믐달을 좀처럼 보지 못했다. 이상할 정도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졌고 9시 전에는 깨어나지 못했다. 겨울잠을 자는 것 같았어,라고 아내는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아무도 없는 경우가 잦았다. 아내가 챙겨둔 아침이 보였다. 그녀는 늘 형광색 실리콘 덮개를 쓴다. 


  아내는 아침을 거르는 법이 없다. 아무리 바빠도, 힘에 부치고 무언가에 쫓길수록 식사를 더 제대로 챙겨 먹는다. 활력이 풍부한 아내는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 이를테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논의를 쓰다가 7시부터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8시가 되면 학교로 출발한다. 8시간을 강의하고 돌아와 막내를 데리고 가정의학과를 다녀온다. 저녁은 당연히 정찬으로 차려 먹는다. 랩 회의와 논문 미팅까지 마치고 나면 야식을 차린다. 쥐포를 굽기도 하고 새 김치를 꺼내 찬밥에 올려 먹기도 한다. 김을 굽거나 두유를 만들어 먹을 때도 있다. 두유 제조기를 산 이후부터는 두유를 만들어 먹는 비율이 대폭 증가했다. 이제 씻고 누워 잠시 휴대전화를 연다. 즐겨보는 푸바오 영상을 보며 킥킥거리며 웃다가 문득 내게 말을 건다. 근데 여보, 나 왜 이렇게 피곤하지?’ 나는 웃으며 말한다. 그러게. 하지만 나라면 아마 오늘 자기가 한 일의 절반도 못 했을걸? 한참 전에 이미 어딘가 주저앉아서 어째서 지구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걸? 그러면 아내는 씩 웃으며 돌아눕는다. 그렇지? 내가 나약하고 어리광쟁이라 그런 거 아니지? 말꼬리를 길게 끄는 모양새가 기분이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지금보다 30퍼센트는 더 나약했으면 좋겠어,라고 속으로만 말한다.     


  방학이 시작되었음에도 아내의 일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학기 중보다 더 바빠 보이기도 한다. 특히 연구실 일은 마치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그간 미뤄뒀던 대규모 실증과 학회지 투고, 추가 연구 참가자 모집, 도구 개발, 연구 제안서 작성 등을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그녀는 지금도 무수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마치 시간의 멱살을 잡아당기는 듯한 광폭한 태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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