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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18. 2024

그래도 사랑해 보려고요

소설

  그래도 사랑해 보려고요

  왜, 미운 구석 한두 가지쯤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저도 해보려고요, 그렇게

  바보처럼, 천치처럼     




  14. 그래도 사랑해 보려고요.


  폭설이 예고되었고 아침부터 싸락눈이 흩날렸다.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것은 오전 11시였다.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것을 신호로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머리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따뜻한 무언가가 당길 날씨다. 그저 따뜻한 무언가면 된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두 남자는 멀리서 두런두런 밖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 남자는 작고 깡마른 체구다. 눈썹이 아래로 처져 온화한 인상을 주었지만 말투는 꽤 다부지고 거칠다. 다른 한쪽은 거의 듣기만 한다. 남자들의 대화라서 그런지 단조롭고 군더더기가 없다.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은 작고 깡마른 쪽이다. 본격적인 사업 얘기에 들어가자 깡마른 쪽은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표정의 거의 변화가 없던 반코트 차림의 남자가 커피잔을 든다. 하지만 이미 다 마시고 없다. 그는 카운터로 다가와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한다. 그는 고양이를 닮았다. 고양이는 기세로 말한다. 그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의 잔에 에스프레소 반 샷을 더 담았다. 아마도 지금 그의 기분에는 쓰디쓴 커피가 어울릴 것이다.     


  회색이 모두 눈구름이었던 것처럼 폭설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두 남자는 한 시간쯤 카페에 머물다 더 거세어지는 눈발을 해치고 주차장을 벗어났다. 올겨울 들어 벌써 다섯 번째로 보는 소낙눈이었다. 사방이 하얘질 만큼 눈보라의 밀도는 짙었다. 운전자들에게는 어지럼증을, 아이들에게는 설화의 한 장면을, 내게는 제설의 욕구를 떠올리게 하는 눈보라였다. 눈을 치우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일이다. 하지만 바보 같은 일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어울린다고 느꼈다. 비질의 시작과 끝이 먼지로 시작해 먼지로 끝나는 것처럼. 


  넥워머의 단단한 부분을 코끝에 맞춘 뒤 뒤를 조이고 아랫단을 카라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핫팩을 흔들어 패딩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채운다. 후드를 쓰고 목장갑을 낀 뒤 밖으로 나가면 겨울이 나를 비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안전화를 신은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바람에 담뱃재가 떨어져 나가며 빨간 불꽃이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울타리에 걸쳐 서 있다가 국밥집 쪽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나는 제설에 쓸 아랫면이 넓은 삽을 챙겼다. 자동차들이 잠시 섰던 공간도 빠짐없이 눈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제설용 삽을 비스듬히 세워 아랫배에 걸었다. 그리고 길을 만드는 기분으로 눈밭을 걷기 시작했다. 가끔 턱에 걸려 비틀거리긴 했지만 작업은 순조로웠다. 눈을 다 치울 때까지 작업이 계속된다는 전제만 없으면 제설은 꽤 괜찮은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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