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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19. 2024

그저 건너편에서 가끔

소설

  새는 부러진 날개로도 하늘을 난다  

  살아있는 한 심장이 멎지 않는 것처럼

  결코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15. 그저 건너편에서 가끔


  이따금 바람에 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들려오는 종소리가 혼곤해지던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 짙어지는 한기를 느끼며 가스난로를 3단계로 올렸다. 바람은 내게 움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더치커피를 정리하고 남은 설거지를 했다. 저울에 브라질 200그램을 달아 그라인더로 분쇄했다. 더치커피에 적합한 입자 크기는 핸드드립보다 가늘고 에스프레소보다 굵은 정도다. 해변의 모래처럼 뽀얗고 바람을 이길 만큼 미세하면 좋다. 용기에 부으면 고운 모래를 손바닥으로 쓰는 소리가 난다. 소리가 거칠면 지나치게 굵은 것이다. 입자의 크기는 템핑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너무 굵으면 바스러지는 느낌이 난다. 너무 가늘면 푹신한 솜을 누르는 것처럼 질기다. 부드럽게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물러서지 않는 정도가 적절하다.

     

  용기를 프레임에 걸고 얼음물을 떨어트린다. 3초에 한 방울이 적당하다. 속으로 셋을 세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를 관찰한다. 노브를 엄지손가락으로 굴리면 물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빠르면 물이 고이고 느리면 적셔진 부분과 적셔지지 않은 부분 사이에 틈이 생긴다. 추출하되 우려내지 않고 커피 입자를 고르게 통과하도록 속도를 조절하는 것. 더치의 묘미는 그런 데 있다. 세팅을 마치면 시간이 알아서 일한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그림자 한 쌍이 유리문에 서성이는 게 보였다. 나는 OPEN이라고 쓰인 전광판에 불을 켰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 유리문에서 얼굴을 뗐고 옆에 있던 체크무늬 치마 여학생이 한걸음 물러섰다. 육교 건너 P 학교 학생들이었다. 방송반 소속으로 지난가을 열린 학예회에서 사회를 맡았다. 예은, 예지라고 했던가. 이름처럼 자매는 아니었지만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우선 긴 머리가 어깨를 덮었고 안경을 썼다. 예은은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 늘씬해 인상이었고 예지는 상대적으로 통통한 편이었지만 얼굴이 작고 귀여웠다. 둘이 함께 있으면 늘 예은이 언니 취급을 받았다. 예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예지는 얼굴이 빨개지며 생일은 제가 더 빠르거든요, 하고 항변했다. 


  둘의 어깨에는 눈이 쌓였고 종아리는 빨갛게 얼어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손짓하자 둘은 잠시 서로 마주 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쪽은 예지였다. 바닥에 젖은 발자국이 찍혔다. 예은과 예지는 난로 앞으로 다가와 손과 발을 녹였다. 소낙눈에 둘 다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의 손에 핫초코 한 잔씩을 쥐어주었다. 예은은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두꺼운 구름층 사이로 잠시 해가 비쳤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공중으로 솟구쳤고, 햇빛에 반짝이다가 짙은 그림자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후후 불며 핫초코를 마시던 예지가 카페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고양이들은 어디 갔어요? 


  예은과 예지는 지난여름 매일 같이 카페를 드나들던 아이들이었다. 학생들이 P 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방송반을 하며 점심시간마다 교내 라디오 방송을 한다는 것도, 시나리오 작업도 직접 한다는 것도 모두 그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P 학교 학예회에 갔던 건 둘의 부탁 때문이었다. 예은의 부모님 자리가 빈다며 참석하기만 하면 100퍼센트 당첨된다는 쿠폰을 내게 미리 쥐어 준 사람은 예지였다. 나는 둘의 남다른 사회 실력에 놀랐고 학생 수가 10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더 놀랐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경품에 당첨됐는데 내가 받은 건 천 재질의 작고 귀여운 필통이었다. 나는 그것을 예은에게 주었다. 예은은 말수가 적고 감정표현이 드문 아이였다. 아기새처럼 조잘거리는 쪽은 늘 예지였다. 예은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예지를 통해 전해 들은 사실이었다. 


  털이 하얗고 움직임이 굼뜬 고양이의 이름은 라떼였다. 라떼는 예지의 무릎에 앉아있는 걸 좋아했다. 예은은 그저 건너편에서 가끔 라떼에게 시선을 던질 뿐 손을 뻗어 쓰다듬는 일도 드물었다. 둘의 시선은 자주 만났다. 라떼는 예은이 앉은 쪽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라떼는 그 아이가 자신을 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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