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전우형 Feb 21. 2024

정체감으로 가득한 마음과 달리

소설

  이른 아침 빗소리를 들었다

  자동차들은 겨울비보다 빠른 속도로

  내게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커튼을 쳤다

  우리를 연결하던 단선 회로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17. 정체감으로 가득한 마음과 달리     


  정체감으로 가득한 마음과 달리 시간은 나비처럼 발랄했다. 초침의 절도 있는 동작이 시간의 엄중함을 내게 알려주었다. 너는 단 1초의 시간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어. 벽걸이 시계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태엽에 손톱을 걸어 한 칸씩 넘기는 기분. 종일 내리는 비. 겨울 같지 않은 날씨. 구름 너머에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종잇장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공기를 칼로 베는 소리 역시도. 잠든 아이의 숨소리처럼 어떤 마음은 날씨가 정해주기도한다. 나는 미루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적막을 덜어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묻어두었다 펼치면 안에서 곪던 시간이 다시 파릇파릇하게 되살아나리라 믿는다. 언젠가 말했듯 믿음은 의외로 쓸만한 구석이 있다.     


  책은 다른 모양의 향기를 풍긴다. 열쇠가 그려진 노트처럼 그 향기는 닫혀있던 마음 하나를 연다. 작은 깃털 하나가 중력을 거스르듯이 아주 천천히 상승하다가 정지했다. 그때 시간도 멈췄다. 고전 역학은 지구에서의 사건을 설명했다. 중력이 지배하는 세계. 그 속에서 우리는 늘 일정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늘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우주를 본다. 땅에서 태어난 인류가 날아오르려는 건 어쩌면 욕심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건 중력만큼이나 거대하고 무겁다. 무게는 중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질량은 불변이어서 결국 삶은 일정한 시간을 살아내는 방법뿐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산을 오르는 걸 좋아했다. 그런 엄마를 따라 토요일이면 4시간씩 산을 탔다. 산을 오르는 건 고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을 닮았다. 세상이 당기는 방향과 반대로 운동하는 것. 관성에 일정량의 변화를 가하는 것. 그런 식으로 엄마는 현실을 버틸 에너지를 만들어 나갔다. 일정한 삶의 궤도를 타는 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망가지는 일이었다.     


  가업을 물려받아 가로등 회사를 운영하는 고등학교 친구, J는 5년 전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즐긴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절벽의 중간 지점에서 작은 돌기 하나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J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J는 그런 식의 표현을 전혀 쓰지 않던 친구였다. J는 직설적이었고 돌려 말하는 걸 싫어했다. 특히 함의를 숨기는 식의 화법을 증오했다.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인간형.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체가 유난히 발달해 있었다. 암벽등반에 적합한 체형은 아니다. 체중을 줄여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J는 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했다. 괴롭히고 싶지 않아. 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물론 J는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J는 한 회사의 오너니까. 오너는 친절할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하지만 작은 돌기 하나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J는 마음의 무게가 일정량 덜어지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틈도 J에게는 분명 소중했을 것이다.     


  J는 배경지식이 없는 상대를 이해시키는데 소질이 있었다. 수영을 잘해서 해군사관학교에 갔다면 썩 어울리는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J는 성적이 나빴고 나는 맥주병이었다. 그 어긋남이 현재의 시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J는 수능을 앞둔 날에도 내게 평영을 가르쳐 주려 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듣고도 물에 뜨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선 몸에 힘을 빼. 머리를 과도하게 들지 말고. 팔을 크게 저을 필요 없어. 아주 조금만. 딱 숨을 쉴 만큼만 올라오면 돼. 다리를 접었다 펼친 다음 곧게 모으고. 발가락이 닿을 때까지 쭉. 잔발 차지 말고. 이제 리듬을 타면 돼. 물속에 들어갔을 때 코로 공기를 내뱉는 거야. 비워야 마실 수 있어. 하체가 떠오른 상태에서 킥을 해야 앞으로 나가.      


  J와 나는 서로를 존중했지만 결국 낭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표정이었고 J는 외계 생명체와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시 바닥을 내려다봤을 때 깃털은 떨어져 있었다. 유선형의 몸을 곱게 말고서 육지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깃털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전 16화 나는 손이 따뜻해서 괜찮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