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할 일은 '감정'을 보는 것

감정을 보면 '내가' 보인다.

by 작가 전우형


한 사업가가 있었다. 작은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그 사람은 큰 위기를 맞이한다. 사업자금을 지급해야 할 업체가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IMF 때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온 힘을 들여 개인사업을 키워가던 그 사업가에게 있어, 이 일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변제해야 할 금액이 5억 원에 달했지만 그의 수중에는 만 원짜리 한 장 없었다. 급전을 융통하러 다녀야 하는데 자동차 계기판에 주유등이 점등되었다. 당장 기름 넣을 돈조차 없는 막막함과 암담함에 그 사업가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분노와 증오가 솟아올랐고, 부도를 내고 잠적한 사람을 찾아가 그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그 사람을 찾아 나설 여력도 없었다. 그것이 그를 더 미치게 했다. 무력해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당장 가족부터 원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채무자들의 독촉 전화가 빗발쳤고, 중학생 아이의 등록금조차 낼 수 없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원망만 늘어놓는 가족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 허탈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일해왔던 걸까.' 세상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았고, 외로웠다. 광야에서 쉴 곳도, 기댈 곳도 없이 뜨거운 태양과 바람을 홀로 맞으며 서 있는 듯, 외롭고 서러웠다. 그토록 깊은 허탈감과 좌절감에 시달리며, 몇 날 며칠을 소주병을 부여잡은 채 폐인처럼 지냈다. 과연 이 사업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현실에 집중하는 방법을 알았던 이 사업가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잠적하고 도주해버린 사람을 찾아서 복수해도 자신의 현실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음을 그는 감정 정리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오히려 그를 쫓아다니는 동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회생기회조차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차라리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감정 덩어리들을 걷어내고 마비되었던 생각 회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채 범죄자로 남을 수는 없어. 나는 반드시 다시 일어서겠어!’


오히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재기하기 위해 노력할 의욕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다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어려움을 딛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만약 부도가 났을 때, 자신을 망하게 한 상대방을 향한 분노만 곱씹은 채 과거에 갇혀 있었다면, 좌절감에 압도된 채 무력하게 시간만 허비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은 언제 가장 힘들다고 느낄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던 시원섭섭한 순간일까? 누군가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장례식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흐느낌을 뒤로한 채 멀어져야만 했던 이별의 순간일까?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직장 동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을 때. 나이 어린 사람에게 무시당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이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자괴감, 억울함과 답답함 등은 우리를 또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만드는 감정들이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은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다. 감정이 복잡하고 알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우리 마음속에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양가감정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증오를 느끼면서도 그리움이 넌지시 고개를 드는 것, 독신의 삶을 원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것. 사랑하면서도 미운 것.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후련한 것.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의 감정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이중적인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도덕성이나 양심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며, 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원한, 분노, 증오, 억울함 같은 감정들은 우리를 과거의 어떤 순간에 매여있도록 함으로써 현재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한다. 이처럼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고,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마음들로 인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낀다. 이것은 우리를 자책하게 하고, 힘들게 만든다.


안타까운 점은 이처럼 힘든 순간을 맞이할 때, 자기 파괴적인 행위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술, 담배, 게임이 있다. 이런 것들이 주로 사용되는 이유는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로부터 탈출한 것 같은 '착시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알코올과 니코틴 등은 잠시 우리의 현실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실제적인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해 준다. 게임은 또 다른 세상에 몰입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잠시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돌린다고 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회피'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눈을 돌리는 순간 시야에서는 사라지지만,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펀치를 맞는다. 대비하지 못한 채 당하는 공격은 더 큰 충격을 야기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쇼핑중독'이 있다. 이들은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는 즐거움으로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한다. 이들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들이고 저장하기 시작한다. 속속 도착하는 물건들은 마치 그간의 노고를 보상해주는 듯 하지만, 그 즐거움은 딱 택배를 받는 순간이나, 언박싱의 순간까지만 남는다. 이미 쌓여있는 택배 상자들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보며 또 다른 죄책감에 빠진다. 지인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힘들 때 하는 말은 듣는 사람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한두 번은 위로의 차원에서 동조해주겠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지인들은 점점 만남을 기피할 것이다. 아마도 점점 더 다른 약속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의 문제는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조차 빠듯하고 바쁘기에, 타인에게 기대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더 외로워지거나 더 힘들어진다.


이 모든 행위들은 일시적으로 상황을 묻어두는 것일 뿐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 나빠지고, 해결은 더 어려워진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던 일도 정말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더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와 자책이 더해진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위가 오히려 또 다른 스트레스를 얹어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동안 쌓인 감정들이 풀리지 않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감정들이 양산되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진짜 감정’들은 점점 더 찾을 수 없게 된다.




건강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우리는 감정을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면에 숨은 감정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다 보면 힘든 순간은 지나간다. 물론 원인에는 외부적, 환경적 요인도 존재한다. 하지만 내면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 상황을 맞이하는 내가 변화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고 같은 위기를 스스로 끌어당기고 만다. 무엇보다도 나를 기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원인을 내가 아닌 것으로부터 찾으려 하고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점점 더 어렵게 한다.


숨어있는 감정들이 방치되면 나도 모르게 힘들어진다. 왜 그런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힘든 상황에 나를 놓아두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특히, 그런 시간이 1년, 3년, 5년, 10년... 이렇게 쌓여가면 어느 순간 갑자기 아무런 저항할 힘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온다. 나는 그런 번아웃을 경험했고 그로 인한 극심한 우울증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었다. 물론, 지금 그 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감정에 대한 이슈들을 그때도 알았다면, 나를 돌볼 수 있고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때와 같은 시기를 보냈더라도 훨씬 덜 힘들었을 것임은 확신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감정을 느끼지 않고 살 수도 없다. 다만 스트레스는 관리하고 감정은 정리하며 자신의 삶을 일정 범위 내에서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