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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1월은 기억되겠지요

1월 31일에 부쳐

by 작가 전우형

살아낸다는 건 즐거운 일일지도요. 멋지고 폼나는 일들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뾰족하게 깎은 연필심도 몇 자 써 내려가다 보면 뭉툭해지는 것처럼, 삶은 한 사람이 가진 뾰족한 것들을 뭉툭하게, 그래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게 누그러트리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면서, 삶의 형태도 모습도 변해가나 봅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듯할 때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소멸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니 살아간다는 건 곧 매 순간 죽어간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너무 우울한 이야기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우울과 가까운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에게도 삶의 즐거움은 존재합니다. 때때로 저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봅니다. 누가 곁에 있을까. 인사할 시간은 있을까.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살아있다고 부를 만한 상태일까. 나는 만족하고 있을까. 죽기 직전에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그 말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살아는 있을까. 그럼 지금부터 그때 전할 말들을 정리해 두어야겠다. 편지로 남겨야겠다.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으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해서 잡은 손등 위에 짧은 낱말 하나도 그리지 못할 수 있으니.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현재를 움직이게 하니까요. 살아낸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것. 어떤 이에게는 그런 자각이 성취일 수도 있겠지요.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정성 들인 요리를 나누는 것일 테고 또 어떤 이에게는 두근거리는 로맨스 영화를 처음 만난 사람 옆에 앉아 관람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를 테니까요. 저의 경우에는 그것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것일 뿐입니다. 마지막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아직 살아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호흡하는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저는 마지막 호흡의 순간을 고대합니다. 호흡은 고단한 작업입니다. 살아있는 한 이 작업은 쉼 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깊게, 때로는 밭게. 어떤 때는 아무리 들이켜도 숨이 모자라고 또 어떤 때는 한없이 내뱉어도 가슴에 맺힌 것들이 뱉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작업을 매 순간, 살아있기에 충분할 만큼 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끊어져, 목에 숨이 닿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졌다 말합니다. 어찌 고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역시 살아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그것은 호흡하는 존재와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뒤섞일 때, 생의 교차가 이루어지고, 세계와 세계가 만납니다. 그 교집합이 존재의 기억을 자극해 소재들을 모아줍니다. 그렇게 기억은 지나온 시간의 질량이 됩니다. 때로 과거가 현재마저 멈춰 세울 만큼 버거울 때, 기억은 소각되기도 합니다. 아주 아플 때, 기억을 뭉텅이 뭉텅이 잘라내기도 합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은 눈을 돌려도 소리로서 윤곽을 조각해 냅니다. 공기의 흐름과 살갗을 스치는 한기, 뼛속깊이 파고든 한없는 시림. 너무 행복해서, 너무 고마워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너무 따뜻해서 지우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있습니다. 언어와 숨결, 눈동자에 비친 달빛의 세세한 잎맥 하나하나까지 세포에 담아두고 싶은 그런 순간들.

당신의 1월은 어떠했습니까. 삶의 마지막을 떠올려도 우울하지 않을 만큼 충만했습니까. 저는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호흡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떠도는 조각구름도 무심히 넘기지 않고 그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거친 행동과 표현에 숨은 진심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취하는 삶의 방식과 존재에 대한 시선이 삶의 아귀마다 대못처럼 품고 있던 저의 예기를 누그러트려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과 마주쳐 호흡을 나누고 세계가 만나고 시간과 기억을 공유하는 일은 생의 마지막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1월이라는 또 하나의 끝을 넘으며, 아무것도 아닌 시간과 기억들 속에서, 너울너울 날아가지 않을 추억의 질량 한 줌을 마음에 간직하기로. 소중히 간직해 모아 왔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과 애초부터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생을 붙드는 방식의 부재나 성글디 성근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인해 소중히 간직할 그 무엇 자체를 형성하지 못했던 이의 공허함 중 어느 쪽이 더 아플지. 무너졌을지. 고독하고 고통스러워 무감각해지자 마음먹었을지. 그러나 그런 것들을 비교할 이유조차 없이 나는, 어쩌면 영영 잃어버릴지 모를 것들에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잃을 그 순간을 위해 소중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보기로. 추상적이고, 디테일은 헛발질을 거듭하더라도 우리의 1월은 기억으로 남겠지요. 그것을 움켜쥐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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