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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사이

에세이

by 작가 전우형

묻어둔 말이 설렘을 자극하고, 녹은 눈만 땅을 적실 수 있다.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지고, 시간은 지나온 길을 아름답게 한다. 멀어지고 나면 가장 멀리하던 사람부터 떠오르는 역설. 거리에 비례해 인력은 작용하는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먼 곳의 사물을 붙잡아두려면 가까운 것보다 강한 힘이 필요할 테니까. 강한 힘은 증오를 닮았다. 가장 가까운 사이란 가장 먼저 멀어질 수 있는 사이나 다름없고. 눈을 감고 마구 손을 휘두르면 가까운 사람부터 맞는다. 가까운 이는 가장 많은 상처를 입고, 또 가장 많은 상처를 입힌다.


눈은 몸에 닿기 전부터 이미 녹고 있다. 사랑도 그렇다. 그래서 형체를 유지하기 어렵다. 맞닿은 순간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하니까. 눈의 생애가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이유는 한정된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1월의 새벽에, 눈은 어느 때보다도 더 뜨겁다. 그 열기가 서로를 뭉치게 하고 대기에 퍼져 있던 먼지까지 품게 만든다. 마음은 타도 재가 남지 않는다. 겨울을 태우던 그을음조차도 마음과는 별개다. 그 속에 사랑이 있다. 떨어져 사라질 운명에도 눈은,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치열함에 대해 웅변하는지도 모른다. 이루어지지 않을 일에 대하여, 혹은 이루어내지 못할 일에 대하여.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은, 무한한 궤도의 서로를 잇는 선들이 바로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은 인연을 닮았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보며 걷는다. 그 발자국은 누군가의 과거이고, 과거는 영원하지 않지만 바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일정 시간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눈밭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과 같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누군가에게 닿을지 모를 발자국을 과거에 남긴다. 그런 식으로 서로의 시간은 일정한 혹은 임의의 간격을 두고 접점을 만든다.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과 함께하고 영원히 함께할 것 같던 사람과도 이별의 수순을 밟는다. 그것은 눈의 궤적이 서로 뒤섞이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완전히 이어지지도, 또 완전히 별개의 삶을 살아가지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상태는 함께라고 말하고 어떤 상태는 이별이라 단정 짓는다. 이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순간도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인 시간도 혼자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


누군가의 과거가 나의 현재가 될 때, 혹은 나의 과거가 누군가의 현재가 될 때, 우리는 함께하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다. 기록이란 기억하는 것이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고, 눈이 서로를 끌어안는 것이다. 함께 하고 싶다면 그를 기억에 잘 담아두어야 한다. 그 일정량의 과거가 손을 놓은 후에도 남아있는 온기처럼 한 사람의 영혼을 품는다.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기도로서 누군가를 품을 수 있다. 기도란 옆에 없을 때에도 함께 하는 것, 함께 하지 못할 때에도 그를 생각하는 것. 그의 안녕과,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것과, 그가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기를 기원하는 것과, 그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하는 것. 기도는 온몸으로 뻗은 혈관을 따라 영혼을 번성하게 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긴 겨울을 날 수 있는 것은 기도가 가진 그런 힘 덕분이다.


* 표지 : 나날이 자줏빛 꽃을 더하는 카페 정원의 채송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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