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흐릿해진다.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 어디까지 가르쳤는지, 얼마나 걸어왔는지, 그래서 이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뚜껑이 열려 있던 물티슈처럼 메마른 겉면에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안부가 묻어 있고, 손등에 남긴 메모는 시작하였으나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연속된 일상 속에서 '매듭짓다'라는 것이 어떠한 상태여야 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칠 일은 없다. 하지만 문장의 어딘가에서는 쉼표와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산맥 사이에도 강은 흐르고 도로가 놓인다. 경계를 정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국경을 통과할 때 일정한 절차가 필요한 것처럼 여기까지가 나의 하루다,라고 지정하는 것은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인 어떤 상태와 연관되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날 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독특하다. 커피를 내릴 때 굵기와 온도를 조절하는 것처럼 생각에는 다이얼이 있고, 그걸 이리저리 돌리며 초점을 맞춘다. 카메라 렌즈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어릴 적 아버지께서 들고 다니던 본체보다 더 큰, 그래서 가분수처럼 보이던 어떤 물체를 기억한다. 필름산업이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저물어가기 전에는 사진이란 무릇 캄캄한 방에서 태어나야 정석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무언가를 정확히 남기기 위해서는 필름이라는 매개가 요구되던 시절. 그 속에 담긴 세상이 얼마나 치열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했는지, 변화하는 세상을 변하지 않는 틀에 묻어두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얼마나 스스로 변하지 않는 사물을 닮으려 했는지. 나의 세상을 온전히 타인과 공유하기 위한 시도는 순간을 훼손 없이 담기 위한 욕구와 결합됐고 그런 사진은 하나의 엽서가 되었다. 때로 사진의 이면에는 그곳에 담기지 않은 추억이 새겨졌고, 사진의 등장인물보다도 사진을 찍어주던 이가 그날에 대해 더 잘 기억하게 만들곤 했다.
46페이지 다음에 15페이지, 18페이지 다음에 31페이지, 34페이지 다음에 47페이지. 순서가 뒤죽박죽인 소설을 읽을 때 의외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31페이지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묻은 커피 자국처럼, 나는 아직 커피를 쏟지 않았지만 46페이지 다음에 이어질 15페이지를 읽다가 커피를 쏟을 수도 있다.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속에 작가가 없어야 내가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타이머를 맞추고 달려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내가 진정 담고 싶었던 장면이 아닐 확률이 높은 것처럼. 그저 바람에 나부낄 뿐인 눈조각이 나를 위로했던 것처럼. 그날 나는 눈을 손가락으로 집어 비볐다. 찬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물기만 엄지와 검지 사이에 고였다. 눈을 만질 때의 세세한 감촉을 사진처럼 구체적으로 담을 수는 없지만 분명 변하는 무언가를 볼 때 내면에서도 같은 종류의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사소한 변화를 감각하는 일이 집중과 관심을 요한다는 걸 잊고 지내다가도 요란한 굉음을 일으키며 비행하는 전투기 편대와 그들이 하늘에 그어놓은 비행운을 보면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 자극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보면서, 거대한 낙차에도 불구하고 중력을 거스르는 듯 사뿐히 내려앉는 움직임과, 한동안 자신의 올곧은 심성을 유지하는 끈기에 이르기까지, 눈은 내가 이때껏 만져본 사물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자극적이지 않았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차분하면서도 고요한 냉기로 메마른 마음에 작은 물기를 제공해 주었다. 허겁지겁 흡수하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위로였다. 잠깐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이 비밀스레 나눴을 이야기처럼 그 위로는 분명 존재했으나 내용을 알 수 없었고 심지어는 이유 없이 소외당한 것 같은 묘한 느낌도 갖게 했다. 어슴푸레 바깥의 빛이 희미해지던 밤, 색이 없는 얼굴이 창에 비친 것처럼, 눈의 위로에는 두 가지 상이 동시에 맺혀 있다. 나는 그런 식의 위로를 알지 못하지만 만약 이제라도 그에게 위로를 건넬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눈처럼 그의 밤에 소리 없이 내리고 싶었다.
다시 생각의 관점으로 돌아와서, 한번 끊어진 생각과 생각을 잇기 위해서는 접착제가 필요할까, 아니면 연고가 필요할까. 만약 결이 다른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면 아귀가 맞지 않는 두 생각을 단단하게 붙일 접착제가 필요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면 끊어진 자리에 새살이 돋도록 연고를 발라준다. 접착제든 연고든 한번 끊어졌다가 이은 자리에는 마디가 생긴다. 생각의 마디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의외로 하루와 하루 사이에는 마디가 없다. 자정이 되면 날짜가 바뀌지만 우리는 여전히 밤이었던 오늘에서 여전히 밤일 내일로 옮겨갈 뿐이다. 보드게임에서 주사위를 굴려 1이 나온 것처럼. 그 사이에 꿈이 끼어든다면 마디처럼 느껴질 어떤 순간을 남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하루와 하루 사이의 마디라기보다는 꿈과 현실 사이의 그것으로 보는 게 맞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떨까. 그에 대한 기억은 날로 뚜렷해지기도 한다. 시간은 추억을 보정하기라도 하는지, 추수를 앞둔 황금빛 들판처럼 떠난 후의 그는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있다. 나는 그를 그리워하고 때로는 기억의 어떤 장면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런 식의 미련은 시간을 살아갈 기회가 한 번 뿐임을 깨닫게 할 뿐이다. 전하지 못한 말에 대하여, 그를 향한 진심이 그를 위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과거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고,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만, 정말로 신이 변덕이라도 부려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둔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고 말 것이라는 걸 안다. 두려움이 많은 이는 선택의 책임을 지기 싫어하고,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기보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보수적인 태도야말로 눈사람에겐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을 텐데. 눈사람은 왜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던 것일까. 손끝이 녹은 물이 그의 눈물에 더해질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었던 것은 그 눈물이 우리 사이를 매듭짓는 일임을 이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때때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바닥을 적시기도 하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