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를 시작한 지도 5개월이 흘렀다. 5월 19일 '그냥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시작으로 총 93편의 글을 올렸고, 2개의 브런치 북과 6개의 매거진을 발간했다.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며 그 한 편의 글이 누군가에게 하나의 메시지로 전달되기를 바랐고, 그것이 작가로서의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염원도 있었다. 게으름과 의지박약으로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나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매일 한 편씩 쓰려고 하다 보면,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이틀에 한 번은 글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름대로는 꾸준함에 만족한다.
때때로 사람은 무리를 하면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했던 바를 모두 이루어내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고2까지 야자 땡땡이치고 친구와 노래방 가는 것이 취미였던 나는 매번 무릎을 다치면서도 축구에 심취하고 틈나는 대로 리니지,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등 게임을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고3 수험생이 되었고 성적은 바닥이었다.
그즈음 집안에 일이 있었다. 가족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부모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감추거나 누를 수 없는 갈등들 속에 빨리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놀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자각에 힘입어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당시 수능은 400점이 만점이었는데, 고2 때 240점대였던 것을 1년 만에 360점대까지 올렸다. 당장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게 나는 남들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는 사관학교를 얻어걸리듯이 입교했다. 입교 후 알게 되었지만 동기 중에 상당수는 재수, 삼수, 생일 빠른 사수생까지 있었다. '이곳이 그렇게 들어오기 힘든 곳이었나?' 당시의 나는 그저 신기한 기분이었지만, 이 경험은 하나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아, 내가 그동안 안 했던 거지 못했던 것이 아니구나.' 이러한 환상의 파문이 나를 오랜 시간 완벽주의로 이끌었다.
사관학교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관학교에 입교했던 나의 전반기 생활은 처참했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드니 공부고 뭐고 다른 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입교 등수는 당연히 바닥이었지만 졸업 등수는 중간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당시 모든 과목은 상대평가였고 누군가는 반드시 C나 D학점을 받아야만 하는 구조였다. 성적이 어느 정도 누적된 이후에 뒤집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모질게 나를 다그쳤고, 불과 1년 반 만에 160등이었던 등수를 70등까지 끌어올렸다. 성적 향상 최우수로 선발되어 포상도 받았다. 이런 경험은 나에게 또 다른 메시지 하나를 던져주었다. '역시,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나 봐. 죽을 만큼 노력하면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노력도 안 해본 사람들이야'
비슷한 경험들은 장교생활 중간에도 몇 번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죽도록 노력하면 안 될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덤비자 정말 꽤나 많은 성공과 인정이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십수 년의 기간을 환상에 빠져 살았다. 당시에는 환상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실제로 그런 경험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환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해 주었다. 편향은 경험이 누적될수록 점점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긴 환상이 더 이상 현실로 구현되지 못해 실망에 실망을 거듭할 때 즈음 나는 이미 우울증에 시름하고 있었다.
이런 환상들이 위험한 이유는, 때때로 안 될 줄 알았던 일들이 무식할 정도로, 무모할 정도로 달려들다 보면 이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 노력이 실패할 경우도 많지만 그 경험을 교묘하게 비켜나가거나 다른 방식으로 포장해버린다면 적절한 교훈을 제공하지 못한 채 묻어져 버리기 쉽다. 성공의 경험이 주는 쾌감에 익숙해지면 과도한 일반화로 연결되어, 자기 평가를 극도로 상승시키거나 자만과 오만에 빠지기 쉽다. 몇 번의 성공적인 경험에 근거해, 과도하게 상향된 자기 평가를 갖고 살았다. 성격상 그것을 바깥으로 분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의견을 제시할 때 속으로는 '네까짓 게, 뭘 제대로 해보기나 했어?' 이렇게 무시하곤 했다.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 주었지만,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라며 실제로는 내 의견이 맞다 여겼다.
그렇게 나의 삶은 아집, 자만, 그리고 완벽주의와의 전쟁이었다. 어깨의 힘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죽기 직전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미 심지가 다 타버리고 나니 그때 가서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챙겨보겠다고 해도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은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100m 달리기 하듯 인생을 살았다. 42.195km를 완주하는 것이 인생인데, 초반을 무리해서 달리니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갔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자아도취에 빠져 살았던 기간이 십수 년이다. 그 결과 나는 30대 중반이 되기도 전에 번아웃이 찾아와 버렸다. 무리해서 일시적인 성과를 낼 가능성도 있지만, 촛불이 활활 타오를수록 양초는 더 빨리 작아진다는 것을 우울증이 내게 알려주었다.
한 번 정착된 사고방식은 오랜 시간 영향을 미친다. 성공가도를 달릴 줄 알았던 해군 장교 생활과 비전이 밝았던 잠수함 승조원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며 커다란 좌절을 겪었음에도, 아직도 스스로를 몰아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브런치 작가를 시작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좋은 글, 읽을만한 글을 써내겠다고 나를 몰아치고 계속해서 읽고 또 읽으며 자아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휴식을 증오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쉬는 것을 인생의 낭비라 여기는 못된 버릇이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이런 나에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성향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해결책과 방법을 찾는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글을 통해 꾸준히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부족해 보이는 나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우울증이 준 가장 큰 선물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 그런 깨달음이었다. 천천히 오래 달리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고, 연구하고 있다. 매일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한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어떤 주제에 대해 빨리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같이 치솟을 때도 있지만, 막상 펜을 쥐어보거나, 노트북의 깜박이는 프롬프트 앞에 서보면,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것도 써지지 않아 막막하거나, 메시지도 없는 몇 문장 끄적거리는 것이 끝일 때도 많았다.
'정말 이 주제에 대해 써보고 싶은 거야? 왜 그런 거야? 어떤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름의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찾다 보면, 질문의 깊이가 수박 겉핥기로 끝나버리는지, 다른 메시지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쓰고 싶다는 욕망을 잠시 누르고, 또 누르고, 해당 화두에 대한 질문을 누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폭발적으로 하얀 공간이 채워지는 광경을 바라보곤 한다. 이럴 때면 내가 글을 쓰는지, 아니면 나는 세상에 떠도는 메시지들을 글이라는 형태로 바꾸는 도구에 불과한지 판단 내리기 어려울 때도 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현실과 나의 본래 모습을 연결하고 균형을 이루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