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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Apr 05. 2023

2023/04/05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스포일러 있습니다.


  불세출의 바람둥이 철학자 샤르트르는 살아생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얼핏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내용을 좀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본질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가위도 본질이 있고 스피커도 본질이 있지요. 그것들은 무언가를 자르기 위해 존재하고 소리를 내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제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들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의는 분명합니다. 그 의미가 바로 본질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태어난 존재들이니까요. 갓 태어난 아이와 20대 청년, 뇌가 죽어 몸만 살아있는 식물인간. 이들은 각자가 가진 육체적 기능은 차이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를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같은 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다름에도 우리는 모두를 한데 묶어 인간이라고 말하죠.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더라도 인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본질이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그냥 인간이에요.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존입니다.


  그럼 본질이 없는 실존하는 우리는 본질이 있는 어떤 것들보다 못한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바람둥이 자식이 말했듯이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자유롭고 싶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던져져 자유를 선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모든 것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는 존재로 태어났으니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죽어서 흙으로 되돌아가길 선택할 수도 있고 스스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이니까요. 조금 쉽게 말하자면 개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야 말로 삶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게 너무 순진한 말로 들리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요.

  극 중 애블린과 조부 투바키는 같은 갈림길에서 놓이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조부 투바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며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반면 같은 능력을 갖고 똑같이 우주의 모든 경험을 쌓은 애블린은 다른 선택을 하기로 마음을 먹죠. 그녀는 스스로 의미를 찾아 자신의 자리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든 어떤 삶이든 살 수 있는 초월적 존재가 된 에블린이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조부 투바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죠. 그럼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왜? 에블린은 그 삶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극이 어느 한순간에 도달하는 순간 조부 투바키의 전우주적 서사가 가족갈등에 대한 은유로도 보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유에 대한 여지를 분명히 남겨두고 있지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애블린의 삶이 한데 연결되었던 순간들은 되려 그들 모두가 자유의지를 갖고 순간의 옳은 선택을 내리는 개개인으로 비치는 모습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극 중에서 표현된 다중 우주의 존재까지 은유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마 극 중에서는 모두 실재하는 우주였겠지요. 초월적 존재로서의 에블린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길 바랐단 사람들은 이쪽 해석을 더 선호할 것 같습니다. 그 편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위로가 되니까요. 물론 그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선택을 합니다. 좋든 싫든, 그것이 어떤 결정이었든 간에 그 모든 순간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지요. 누군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절대 뒤돌아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높은 확률로 거짓말이겠지요. 우리는 모두들 그런 순간들을 가슴속 어딘가에 숨기고 살아가잖아요. 그렇기에 살아온 삶의 어느 한순간을 부정한다면 지금의 나도 없습니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건 어려운 일입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모든 결정을 내렸던 모든 순간이 당신이었고 저였습니다. 저는 언젠가 떠나보내버린 사람을 아쉬워하고 언젠가의 결정에 대해 마음껏 안타까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믿습니다. 안타까운 마음만큼 현재를 보듬고 내 옆의 사람을 사랑하고 앞으로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의미를 찾아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그런 존재. 즉,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니까요.


   139분의 즐거운 일탈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운이 깊네요. 그래서 이런 잡다한 글이 써진 듯합니다. 실존주의적 해석이 이 영화에 맞는지 어쩐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그냥 제가 생각대로 적은 것일 뿐이니까요.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저는 이 영화에서 어떤 위안을 느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위안은 샤르트르의 글을 읽었을 때 느꼈던 그것과 어딘지 모르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면 무슨 헛소리인가 싶겠지만 저는 그냥 이렇게 느꼈다고 대충 얼버부리면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제 깜냥이 충분치 않네요. 영화는 끝이 났습니다. 여운을 더 즐기고 싶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겠죠. 이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모두들 정진하시길.


"다른 삶이 있다면 당신과 함께 세탁소도 하고 세금도 내면서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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