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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Apr 27. 2022

낙서는 그냥 낙서일 뿐

2022/04/27

  더운 날씨. 거의 여름이었다. 재킷 벗어재 한 팔에 두르고  셔츠 한 장을 메리야스 마냥 입고 걸었다. 얼굴에 땀 흐르고 머리는 덥수룩한 채 면도 하지 않 그런 꼴이었으니 서울역 앞으로 가면 딱일 듯 싶었다. 어느새 땟국물이 배겨 냄새나는 러닝화를 바라보며 거의 일 년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의 여름. 내 꼴은 거의 노숙자. 지난 일 년간 딱히 변한 게 없군.


  시간이 흐르면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친구 녀석에게 다시 연락을 하니 잘 지내는 듯하다. 네 녀석은 항상 그랬다, 면서 그냥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었겠지, 라며 웃어넘긴다. 고향으로 완전히 내려온 건지 묻는 녀석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몰라. 이러다가 갑자기 꼴 받아서 다 뒤집고 금산사로 들어갈 수도 있어.

  친구 녀석이 '그것도 너답긴 하네'라며 또 한 번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뭐 네가 그냥 사라진 게 한두 번이냐?

  미안타 형철아. 그래도 다시 친구 해줘서 고마워. 내가 눈물을 머금고 속으로만 말했다. 굳이 말 안 해도 다 아는 사이 아니겠는가.


  너 오랜만에 왔는데 다음에 시간 되면 시원이 한 번 보러 가자.

  친구가 지나가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러자. 그 나무는 좀 많이 컸다냐?

  내가 물었다.


  몰라. 나도 안 가본 지 오래됐어.

  친구가 덤덤하게 답한다.


  하긴 다들 사느라 바쁘니까.

  내가 친구를 대변하듯이 말했다.


  그럴 리 없다. 고작 30분 차 타고 가서 나무 한 그루에 술 한 병 부어주고 담배 한 대 올려주는 것이 바쁜 것과 무슨 상관인가. 나는 지난 휴일에도 침대에 누워 유튜브만 2시간을 봤다. 우리는 그냥 잊은 거다. 매해 같은 날 시원이의 부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녀석의 방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마지막 외출 전에 벗어놓은 재킷마저 3년간 같은 의자에 그대로 걸쳐져 있었다. 매번 먼지만 털어내는 건지 세탁을 하고 다시 걸어 놓으시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때 아버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시며 이제 그만 찾아오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듯이 말씀하셨다. 그게 벌써 9년 전이다. 나는 차마 말 못 할 과거의 죄책감들이 나를 뒤덮는 걸 느끼면서도 아버님의 그 한마디에 조금 위로를 느끼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내가 얼마나 비열한지에 대한 자책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와 있을 때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 전 연인의 인스타를 훔쳐보곤 했다. 뭐 어때? 그냥 재밌어서 보는 건데,라고 말하던 그 모습은 내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녀에 대한 감정을 떠올릴 때마다 같이 떠올랐다. 서운하게도 그 기억의 잔상은 감정을 희석시켰다.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그 한마디가 어떻게 내 마음에 남게 될지.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 기억이라는 녀석이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서 다르게 적혀간다. 절대 지워지지 않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쉽게 잊혀지고, 소중한 추억이 누군가에게는 무료함을 달래는 장난감 같은 유희일뿐이다.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친구 녀석이 다음에 사라질 때는 귀띔이라도 해주라고 말하며 우리의 통화는 끝이 났다. 더운 날씨. 거의 여름. 느 계절의 끝자락에서 쓰레기봉투에 내다 버린 하와이안 셔츠 한 을 떠올린다. 하루 종일 걷고 달리던 어느 천변을 기억한다. 그 공기를, 서늘하게 변해가던 계절의 변화를, 모든 것이 마지막이길 바랬던 나의 작은 소원을 생각한다.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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